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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say2

침묵, 어머니의 항아리

by lee nam

마당 한편, 볕이 잘 드는 자리에는 늘 묵직한 항아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짙은 갈색의 옹기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 낡고 투박했지만, 어머니에게 그 항아리들은 단순한 저장 용기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어머니의 손맛과 정성, 그리고 켜켜이 쌓인 시간들이 고요히 숨 쉬고 있었다. 특히 겨울이 지나고 봄기운이 완연해질 무렵이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묵은 김치를 꺼내어 우리 밥상에 올려놓으셨다. 붉은 빛깔 깊게 밴 묵은 김치는 톡 쏘는 듯하면서도 시원하고, 씹을수록 깊은 감칠맛이 우러나와 잃었던 입맛을 되살려주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묵은 김치의 깊은 맛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갓 담근 싱싱한 김치의 아삭함과 매콤함에 길들여져 있던 내게 묵은 김치는 시큼하고 물컹한,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존재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늘 묵은 김치를 귀하게 여기셨다. 마치 오랜 시간 묵혀둔 귀한 술처럼, 귀한 손님이 오시거나 특별한 날이면 어김없이 묵은 김치찜이나 묵은 김치찌개가 식탁에 올랐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오래 묵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법이란다. 사람 사는 것도 마찬가지여."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어린 나는 그 의미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지만, 왠지 모르게 어머니의 그 말씀이 묵은 김치의 깊은 맛처럼 마음 한편에 묵직하게 자리 잡았다.


세월이 흘러 나도 어엿한 어른이 되고, 어머니의 나이가 훌쩍 넘었다. 예전처럼 김장을 많이 담그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어머니는 해마다 김장을 하셨고, 몇 포기의 김치는 꼭 묵혀두셨다. 이제는 나 역시 묵은 김치의 깊은 맛을 안다. 톡 쏘는 신맛 뒤에 숨겨진 시원함과 감칠맛, 오랜 시간 숙성되면서 만들어진 그 오묘한 조화는 단순한 김치를 넘어선 깊은 풍미를 선사한다. 묵은 김치를 맛볼 때면, 나는 문득 침묵 속에서 오랜 시간을 견뎌온 어머니의 삶을 떠올리게 된다.


어머니의 삶은 묵묵히 숙성되어 온 묵은 김치와 닮아있다. 젊은 시절, 넉넉지 않은 농촌 살림에도 오 남매를 대학 교육까지 시키며 키우시느라 온갖 고생을 다 하셨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쉴 새 없이 일하시면서도 늘 자식들 걱정이셨고, 맛있는 음식 하나라도 더 해주려고 애쓰셨다. 때로는 힘든 일도 많았겠지만, 어머니는 묵묵히 그 시간을 견뎌내셨다. 마치 항아리 속에서 김치가 발효되듯, 어머니의 삶 또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 더욱 깊어지고 풍요로워졌으리라.


어머니는 당신의 힘든 과거를 쉽게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힘든 일이 있어도 겉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묵묵히 감내하시는 편이었다. 마치 침묵 속에서 깊은 맛을 만들어내는 묵은 김치처럼, 어머니의 속마음은 쉽게 헤아릴 수 없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곁에서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나는 그 침묵 속에 담긴 깊은 사랑과 헌신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자식들을 키워내신 어머니의 깊은 마음은, 묵은 김치 특유의 깊고 풍부한 맛처럼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는 나도 어머니처럼 묵은 김치를 즐겨 먹는다. 묵은 김치찌개를 끓여 밥상에 올릴 때면, 왠지 모르게 어머니와 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든다. 톡 쏘는 신맛과 깊은 감칠맛이 어우러진 묵은 김치찌개를 한 입 먹을 때마다,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과 넉넉한 웃음소리가 떠오른다. 묵은 김치 속에는 어머니의 오랜 시간과 정성뿐만 아니라, 가족을 향한 깊은 사랑과 헌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의 묵은 김치는 단순한 반찬이 아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삶의 지혜와 사랑이 응축된 결정체이며, 우리 가족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타임캡슐과 같다. 앞으로도 나는 묵은 김치를 맛볼 때마다,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깊은 맛을 내는 항아리처럼, 그리고 그 안에서 오랜 시간을 견뎌온 어머니의 깊은 마음을 기억할 것이다. 어머니의 시간은 묵은 김치처럼 깊고 풍요로운 맛으로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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