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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say2

첫사랑은 늘 소설처럼

by lee nam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한 편의 시가 된다. 뚜렷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마음 한구석 깊이 각인되어 오래도록 살아 있는 감정. 때로는 세월 속에 묻힌 듯 잊혔다가도, 문득 책장을 넘기다 한 줄의 문장, 어느 날 내리는 소나기, 저녁노을을 비추는 유리창 너머의 풍경 하나에 조용히 깨어나는 감정이다. 이름 대신 장면으로 떠오르고, 이성보다 감정으로 기억되는 그 마음. 첫사랑은 어쩌면, 설명하지 못하기에 더 오래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첫사랑은 문학을 통해 다시 피어오른다. 황순원의 단편 「소나기」를 처음 읽었던 날, 나는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을 풍경을 만났다. 소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소년이, 밤이 깊도록 호두알을 꼭 쥔 채 이불속에서 몸을 뒤척이는 장면. 그건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그리움, 끝내 닿을 수 없는 아련함, 너무 일찍 끝나버린 마음. 문학은 말이 닿지 않는 감정의 가장 순수한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첫사랑의 숨결을 느낀다.


에드거 앨런 포의 시 「애너벨 리」는 바다 냄새 가득한 서정 속에서 사랑의 영원을 노래한다. “천국의 천사들도 바다 밑의 악마들도 나의 영혼을 그녀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는 절절한 고백은, 사랑이 단순한 감정을 넘어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갈망, 죽음조차 가를 수 없는 애틋함. 만약 누군가를 그렇게까지 사랑해 본 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첫사랑이었거나, 첫사랑을 닮은 마지막 사랑이었을 것이다.


첫사랑은 언제나 청춘의 얼굴을 하고 있다. 괴테의 시 「첫사랑」에서 화자는 덧없는 시간의 저편을 바라보며 묻는다. “아아, 누가 다시 가져다줄 것이냐, 저 아름다운 첫사랑의 날을.” 그리움은 단지 어떤 한 사람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그 시절의 나, 망설임 없이 마음을 내주던 나, 사랑을 믿었던 순진한 나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첫사랑은 결국, 우리가 간직하고 싶은 가장 빛나던 시간의 이름이다.


문학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 첫사랑의 얼굴을 이토록 또렷하게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문학은 잊고 있던 감정을 조용히 꺼내주고, 마음속 희미했던 장면을 다시 한번 선명하게 그려준다. 내가 겪지 못한 사랑도 문학 속에서 상상하게 하고, 잊은 줄 알았던 감정도 다시금 가슴에 불러온다. 어린 왕자가 단 하나의 장미를 사랑했듯,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가 배키를 사랑했듯, 첫사랑은 모든 사람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단 한 사람만의 이야기다. 그래서 첫사랑은, 늘 소설처럼 존재한다.


문학 속 첫사랑은 대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소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진실이다. 이루어진 사랑은 현실이 되고,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기억 속에서 더 아름다워진다. 황순원의 「소나기」가 그러하다. 소년과 소녀가 함께 걸으며 꽃을 꺾고, 눈이 마주치고, 손이 스치며 생긴 짧은 순간의 떨림. 그 짧은 시간이 소설 전체를 채우고, 소녀가 떠난 뒤에도 소년의 가슴에 남은 물기의 감촉은 독자의 가슴에도 오래도록 젖어든다. 사랑은 끝났지만, 그 사랑이 소년을 바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조심스럽다. 낯선 문장에서 오래된 감정이 반짝일까 봐, 어느 한 단어가 과거의 나를 소환할까 봐. 그리고 그런 순간이 오면, 나는 마치 오래된 연인을 만난 듯, 책을 가만히 덮고 한참을 생각에 잠긴다. 문학은 우리에게 첫사랑을 묻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꺼내 보여줄 뿐이다. 당신 마음 어딘가에도, 언젠가 무심히 스쳐간 풍경이 떠오른다면, 그것은 당신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첫사랑일 것이다.


첫사랑은 늘 소설처럼, 짧고 강렬하며, 오래 남는다. 이름조차 흐릿한 그 사랑이 문학 속 한 문장에 살아 있고, 우리 가슴속엔 말없이 흐르는 이야기로 남는다. 나는 오늘도 문학을 읽으며, 다시 한번 그 사랑을 만난다. 그리고 그때의 설렘과 서글픔을 조용히 꺼내어, 잊지 않기로 다짐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한 편의 소설 속 첫사랑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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