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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say2

일상의 숨결, 시

by lee nam

시는 가만히 웅크려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찾아온다. 잊고 있던 감정을 톡 깨워주는 레몬 한 조각처럼, 새벽에 창문을 열었을 때 코끝에 스며드는 풀냄새처럼. 나는 어느 봄날, 마트 주차장 옆 화단에서 피어난 민들레 한 송이를 보고 발길을 멈춘 적이 있다. 바람 한 줄기에도 흔들리는 그 노란 얼굴이 어찌나 단단해 보이던지, 눈물이 핑 돌았다. 그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분명한 언어였다. ‘나는 여기 있다.’ 시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구석에서 조용히 존재의 이유를 이야기한다.


시는 삶의 표면을 스치고 지나가지 않는다. 그 속으로 스며든다. 커피 한 잔을 따르는 소리, 비 오는 날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이것도 ‘살아 있음’의 증거가 아닐까. 시는 우리 일상 속에 박혀 있는 무수한 ‘작은 존재들’을 일으켜 세운다. 노란 우비 입은 아이가 물웅덩이를 껑충 뛰어넘는 장면, 빵집 유리창 너머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길고양이의 눈빛, 누군가의 도시락 속에 곱게 얹힌 방울토마토 하나. 그 섬세한 순간들이 내 안에서 울려 퍼질 때, 시는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시는 왜, 이전보다 더 깊이 존재하려는 선언이 되는가. 그건 아마도 삶이 점점 더 빠르고 얕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뉴스 속 비극에 금세 익숙해지고, 감정조차 속도로 소비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 속도에 시는 저항한다. 멈추게 하고, 다시 바라보게 하고, 오래 들여다보게 한다. 시는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의 가치를 회복시킨다. 그것이 고요한 저항이며, 조용한 선언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단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섬세하게 살아내는 일이라는 것을 시는 알려준다.


시를 쓰는 일은 어쩌면 혼잣말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혼잣말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순간, 그것은 연대가 되고 응시가 된다. 나는 어느 겨울 아침, 카페에서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쪼개던 노신사의 손끝을 보며 시 한 줄이 떠올랐다. 그의 손은 마치 기도를 접듯 조심스러웠고, 그날 나는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몸짓 하나에도 시는 깃든다. 그 몸짓이 말없이도 나를 위로하는 순간, 시는 내가 아닌 타자를 향한 숨결이 된다. 그렇게 시는 존재의 혼잣말에서 공감의 노래로 건너간다.


시는 결국, 사라지지 않겠다는 작고 단단한 다짐이다. 무언가를 간절히 기억하고 싶고, 아직 말하지 못한 감정을 어떻게든 남기고 싶을 때, 시는 피어난다. 그래서 시는 선언이다. 나는 더 이상 얕게 살아가지 않겠노라. 세상의 소란에 휘둘리지 않고, 나만의 깊이로 살아가겠노라. 바쁜 하루의 끝, 잠들기 전, 불 꺼진 방 안에서 입술로 중얼거리는 나만의 시 한 줄. 그 순간, 나는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진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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