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재미시인협회 시인교실에서 열린 김이듬 교수님의 강의는 나의 시 창작과 감각을 다시 일깨워주는 귀한 시간이었다. ‘선을 넘는 시’라는 주제 아래 펼쳐진 이 강의는 단지 문학적 기교나 형식에 대한 설명에 머무르지 않았다. 교수님은 시가 어떻게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지를, 언어의 배치를 통해 삶의 깊이를 건드릴 수 있는지를 예리한 시선으로 짚어주셨다. 그 경계는 물리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존재와 감정, 시간과 공간, 젠더와 신념, 타자와 자아 사이에 그어진 수많은 선들. 시는 그 선들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넘는 예술이다. 이번 강의를 통해 나는 시가 단지 표현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며 사유의 실천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래는 그날의 울림을 되새기며 정리한 내 사유의 기록이다.
시는 단순히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 형식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다르게 바라보게 하고, 우리가 처한 익숙한 인식의 틀을 흔드는 언어적 실천이다. 이번 재미시인협회 시인교실의 주제는 ‘선을 넘는 시’였다. 여기서 선이란 물리적 경계만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존재와 사고, 언어와 규범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경계를 의미한다. 강의는 시가 어떻게 그 경계들을 넘어서 독창적인 감각과 사유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풍부한 예시와 이론을 통해 안내해 주었다. 시는 ‘조금 그리고 영원히 달라지게 만드는 언어’이며, 그것이 가능한 시야말로 진정 우리를 변화시키는 시다.
강의의 첫 번째 주제는 공간과 장소의 변환이었다.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배경이지만, 시적 경험이 개입하면 장소가 된다. 우리가 기억하고 애정을 품은 공간은 감정이 붙은 ‘장소’가 된다. 박준의 「아껴보는 풍경」은 어머니의 삶과 앞마당 풍경을 통해 소박한 장소성을 형상화하고, 박인애의 「버려짐에 대하여」는 노인의 집 앞에 버려진 사물들을 통해 존재의 쓸쓸함을 장소 화한다. 고선경의 「러키슈퍼」는 일상의 골목과 슈퍼 평상, 풍선껌에 이르기까지 도시 공간을 정감과 유머로 재배치한다. 시는 이렇게 익명의 공간에 삶의 온기를 부여하며, 독자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의 풍경을 선물한다.
두 번째 주제는 시간을 시적으로 다루는 방식이었다. 시는 시계의 숫자를 따르는 절대적 시간(크로노스)보다, 감각과 결단, 의미가 스며든 주관적 시간(카이로스)에 주목한다. 한강의 「어느 늦은 저녁 나는」은 흰 공기에 피어오르는 김을 통해 지나가버리는 영원을 포착하고, 「심장의 작전 수행」은 낙숫물 소리에 멈춘 세월을 그린다. 전희진의 「토스터에서 두 쪽의 빵이 나오는 시간」은 토스터 앞 찰나의 집중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교차시키며 내면의 시간 흐름을 시로 끌어온다. 시는 단절된 시간 속에 집중된 감정의 밀도를 담고, 우리로 하여금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고이는 시간’을 경험하게 한다.
세 번째는 ‘타자되기’라는 시적 화법에 대한 이야기였다. 시는 더 이상 ‘나’만의 언어가 아니다. 시인은 숫자, 사물, 동물, 자연 등의 목소리를 빌려 세계를 다시 말한다. 오은의 「0.5」는 시력, 샤프심, 체중, 커플링 무게처럼 변화하는 숫자를 화자로 내세우며, 기능화된 인간의 자아를 반영한다. 서연우의 「클라이맥스」는 어미 청둥오리의 시선으로 계절과 생존, 인간 사회의 이면을 보여주고, 김행숙의 「침대가 말한다」는 침대라는 사물의 기억과 감각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고통을 성찰한다. 타자가 되어보는 시는 존재에 대한 감각을 확장시키며, 윤리적 상상력을 불러온다. 이는 시가 할 수 있는 가장 깊고 섬세한 초월이다.
네 번째는 젠더, 신념, 정체성의 경계를 허무는 시였다. 김현의 「형들의 사랑」은 기존의 사랑의 정의를 해체하며, 가족, 종교, 남성성에 얽힌 감정을 시로 회복한다. 최승자의 「Y를 위하여」는 여성의 몸, 낙태의 고통, 어머니와 아이의 운명적인 분리를 통해 개인의 삶이 정치와 사회 구조에 맞서는 투쟁임을 고백한다. 주민현의 「철새와 엽총」은 히잡을 두른 친구와 함께 앉은 식탁에서 이슬람 여성의 현실과 금기를 넘어서려는 연대를 노래한다. 시는 이처럼 사회가 쉬쉬해온 이야기, 금기시한 감정들을 꺼내어 말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것은 감정의 해방이며, 존재의 복권이다.
다섯 번째로, 시는 현실을 조작하고 비틀어 새롭게 보이게 하는 언어의 기술임이 강조되었다. 송경동의 「수조 앞에서」는 물고기 수조를 통해 사회의 폭력적 관계를 비춘다. 차도하의 「미래의 손」은 공터에서 담배를 피우는 중학생의 이야기 속에서, 시인이 될 가능성과 절망, 언어의 시작이 교차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들은 말 그대로 현실을 ‘비트는 언어’를 사용한다. 시는 세계를 복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낯설게 함으로써,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시각을 부여한다.
마지막으로, 이번 시인교실은 시가 ‘경계를 넘는 사유’라는 것을 다시금 확신시켜 주었다. 공간과 장소, 시간과 감각, 자아와 타자, 성별과 문화, 현실과 언어 사이에 놓인 모든 선들은 시를 통해 흐려지거나 새롭게 그려진다. 시는 감각을 깨우는 언어이며, 윤리를 담은 기술이며, 자유를 탐색하는 정신이다. 선을 넘는 시는 그래서 단순한 문학이 아니라, 우리 삶의 세계를 새로 말하는 행위다. 우리가 시를 쓴다는 건, 더 이상 기존의 방식으로 말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이전보다 더 깊이 존재하고자 하는 선언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시를 쓰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