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Essay2

시인은 곡비다

by lee nam

조선 시대 왕이 승하하면 곡비들이 동원되었다. 곡비는 ‘울어주는 여자’라는 뜻으로, 장례의 슬픔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부러 고용된 이들이었다. 그들은 생전에 왕을 뵌 적도 없었지만, 장례식장에서는 가장 처절하게 통곡하며 진심 어린 이별의 슬픔을 연기했다. 누군가는 이를 거짓이라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 울음 속에서 ‘역할을 감당하는 자의 진심’을 보곤 한다. 시인은 그런 곡비와 같다. 세상이 미처 슬퍼하지 못한 자리에서 대신 울어주는 자, 말하지 못하는 존재의 입이 되어주는 자, 바로 대언자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다.


시를 쓴다는 건 때로 자신이 겪은 일이 아닌데도 깊이 슬퍼하게 되는 일이다. 낙엽 하나 지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무너지는가 하면, 폐지를 줍는 노인의 굽은 등에서 말없이 지나간 세월을 읽어내고 눈물이 솟기도 한다. 나는 그것이 감수성이라기보다 ‘들리는 귀’와 ‘보이는 눈’을 지닌 사람의 사명이라 여긴다. 시인은 세계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존재다. 세상이 귀 기울이지 않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누구도 눈 돌리지 않는 풍경 앞에서 가만히 멈춰 선다. 그 침묵과 외면 속에서 그는 대신 눈물을 흘리고, 언어를 길어 올려 시를 쓴다.


시인은 자기가 직접 겪지 않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도 무너질 수 있어야 한다. 어머니를 여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 시인은 그 울음이 내 울음처럼 들려야 한다. 병상에 누운 남편의 손을 놓지 못하는 노인의 떨림이, 마치 자신의 운명처럼 밀려와야 한다. 세상에는 저마다의 아픔이 있고, 그 아픔은 대부분 조용히 사라져 간다. 시인은 그 조용한 사라짐을 그냥 두지 않고 언어로 붙잡는다. 마치 잊혀가는 무덤 앞에서 외롭게 울고 있는 곡비처럼, 시인은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이름을 불러내고 그를 위한 눈물을 쏟아낸다.


한 편의 시가 때론 그렇게 태어난다. 말을 잃은 것들의 말을 대신 전하고, 눈물을 삼킨 것들의 울음을 대신 흘린다. 시인은 강물의 입장이 되어 흐르고, 나무의 입장이 되어 버틴다. 가로등의 입장이 되어 밤새 외로움을 지키고, 쓰러진 고양이의 입장이 되어 이름 없는 죽음을 기억한다. 그것은 대단한 문학적 기교가 아니라, ‘대신 아파하는 능력’이다. 시는 그저 아름답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때론 고통과 슬픔을 ‘전염’시켜 세상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시를 쓸 때 종종 이렇게 묻는다. ‘지금 이 순간, 누구의 슬픔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가?’ 그 물음 앞에서 시는 시작된다. 소외된 이들의 자리, 말이 금지된 이들의 언어, 마음속 깊은 웅덩이에 고여 있는 눈물, 그것이 시가 되어야 한다. 시는 잘난 사람들의 자서전이 아니라, 들리지 않는 자의 메아리다. 시인은 자기를 비워 타인의 감정을 담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마치 곡비가 자기 목소리를 비워 왕의 장송곡을 부르듯 말이다.


곡비는 울음으로 먹고살았다. 하지만 그 울음이 헛된 것이라고, 돈 받고 우는 것이니 거짓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때로 거짓 울음이 진짜 울음보다 진실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시인이 직접 겪지 않은 일을 써도 그것이 진실이 될 수 있다. 시인이란 존재는 ‘말해진 적 없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시를 통해, 말할 수 없는 것에게 말을 주고, 울 수 없는 것에게 울음을 준다. 세상 모든 생명의 슬픔을 자신의 울음으로 번역하는 사람. 그것이 시인의 일이다.


나는 시가 곡조를 잃지 않는 슬픔이었으면 한다. 삶이 견디기 힘들 때 사람들은 음악을 찾고, 시를 찾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슬픔을 정제하고, 감정을 언어로 길어 올려줄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울음을 대신 떠안고, 타인의 눈물이 되어주는 존재다. 모든 사람이 말없이 고개를 돌릴 때, 시인은 울음을 멈추지 않는 곡비처럼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 한다.


슬픔에도, 고통에도, 소외에도 언어가 필요하다. 그것이 세상에 닿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대신 말함’이 필요하다. 시인은 바로 그 일을 한다. 모든 말 잃은 존재의 곡비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시인의 숙명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선을 넘고 경계를 초월하는 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