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아주 우연한 계기에서 시작될 때가 많다 어느 날 오래된 한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다 문득 어릴 적 골목길이 떠올랐다. 그곳엔 검은흙먼지를 손에 묻히며 땅따먹기를 하던 나와 친구들이 있었다. 불쑥 밀려든 기억은 불완전하고 희미했지만, 그것이 내 마음 한편을 묘하게 적시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날 바로 나는 손에 펜을 쥐고, 기억을 붙잡으려 애썼다. 써 내려가는 동안 마치 오래 잠들어 있던 내가 깨어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글쓰기는 내게, 시간이 덮어버린 기억을 끌어올리는 작은 삽질이 되었다.
기억은 흙 속에 묻힌 조각 같다. 그것은 우리가 애써 잊고자 했거나, 잊을 수밖에 없었던 것들이다. 삶은 바쁘고 고단하다. 매일매일을 살아내기에도 숨이 차니, 오래된 일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그러나 글을 쓰기 시작하면 묻어두었던 시간들이 조용히 속삭이기 시작한다. 그날 그 시간, 내가 느꼈던 두려움, 기쁨, 외로움, 혹은 희망. 글쓰기를 통해 나는 그것들을 다시 만난다. 감정을 지나 기억까지 되짚는 이 작업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어떤 구원의 힘이 있다. 나 자신을 이해하고 품는 힘, 그리고 이제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품을 수 있는 여백의 힘이다.
글을 쓰다 보면, 처음에는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장면이 문득 특별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이를테면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 아버지의 굳은 손, 혹은 봄날 창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던 새소리 같은 것들이다. 그런 장면들을 한 줄 한 줄 적다 보면, 글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서 삶의 한 조각을 형상화하는 행위가 된다. 그것은 기억의 복원일 뿐 아니라, 감정의 재구성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때로 슬프고, 때로 따뜻하며, 때로 용서를 요구한다. 그것이 나를 아프게 했던 기억이든, 내가 누군가를 아프게 했던 순간이든 간에 말이다. 글쓰기는 상처를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처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나는 종종 글을 쓰며 묻는다. 왜 지금 이 기억이 떠오른 걸까? 왜 나는 이 장면을 잊지 못하고 있을까? 그 물음 속에서 나는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된다. 삶을 성찰하고, 존재를 되묻는 이 과정은 일상의 속도와는 다른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 어떤 글은 그저 지나가는 생각을 붙잡는 것이고, 어떤 글은 오래된 감정을 떠올리는 일이며, 어떤 글은 너무 늦기 전에 말해두고 싶은 고백이다. 특히 누군가의 죽음 이후, 나는 글쓰기를 통해 살아 있는 자로서의 내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다. 기억을 꺼내어 말로 옮기고, 그 말들이 다른 이의 마음에 닿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계속 글을 쓰는 이유다.
글쓰기는 어떤 면에서 망각에 대한 저항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고 잊히는 시대에, 나는 문장 하나로 그 흐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거창한 저항이 아니라, 조용한 응시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나를 울렸던 사건들, 나를 키워낸 풍경들을 다시 부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은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용기가 된다. 기억은 꺼내지 않으면 점점 굳어지고 희미해진다. 그러나 글로 쓰면, 그것은 다시 살아나 우리와 눈을 마주친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한 줄의 글을 쓴다. 흙 속에서 오래 잠들었던 기억 하나를 조심스레 꺼내어 햇살 아래 놓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