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동창회 이야기>
어제는 하루 종일 마음이 따뜻했다. 전남여고 미주 시카고 동창회가 있었다. 선배님도, 동기도, 후배들도 한 자리에 모여, 오랜만에 뿌듯한 충만함을 맛보았다. 마치 오래 묵은 항아리를 열었더니 고향 냄새가 났다고 할까. 같은 울타리 안에서 배웠다는 사실 하나로 우리는 금세 하나가 되었다. 그동안 누구는 아프고 누구는 외국에서 손주 키우느라 정신없이 살았건만, 이 날만큼은 다시 열일곱의 우리로 돌아갔다. 교복은 사라졌지만, 아직 빛광자의 배지 하나가 왼쪽 가슴에서 빛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억압된 시대를 살았다. 학창 시절, 영화관조차 자유롭게 갈 수 없었던 시절. 한 달에 한 번 학교의 인솔 하에 단체로 영화를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봄날이었던가. 학생회관에서 본 흑백 영화 한 편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광주 학생 항일운동을 서사로 한 영화였다. 나주로 통학하던 기차 안, 일본 남학생이 전남여고 여학생의 머리를 움켜잡았다는 이야기. 그것이 발단이 되어, 여학생의 남동생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싸움이 벌어졌고, 그 작은 충돌이 민족적 울분의 항거로 번졌다고 했다. 어두운 극장 안, 숨죽인 교복의 행렬 속에서 우리는 어린 가슴으로 ‘나라’라는 단어의 무게를 처음으로 실감했다. 최현배 선생님이 쓰셨다는 감자탑 속의 몇 줄의 시가 어려울 때마다 다시 우리 자신을 세워주는 이정표가 되어왔다.
이런 긍정적인 기억들은 먼 타국까지 와서 뿌리를 내린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했다. 그 시절의 단단한 뿌리, 억척스러움, 그리고 조국에 대한 뭉클한 연대감. 우리 모두는 그 시절의 작은 불씨를 가슴에 품고 이곳까지 살아왔다. 집에서 손수 기른 국화나물을 봉지봉지를 싸가져 와 나눠주는 포근한 선배 언니, 남편들까지 데려왔으나 식비도 받지 않고 넉넉하게 여유를 내어주는 친정 맏언니 같은 선배들, 그 따뜻한 손길 하나하나에도 조용히 타오르는 민족의 혼과. 훈훈한 애교심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음식뿐 아니라, 삶을 나누는 정성이었고, 고향과 학교를 잇는 다정한 정서의 끈이었다.
어떤 영화는 민족의 기억을 남기고, 또 어떤 영화는 우리 안의 순수한 감성을 일깨운다. ‘사운드 오브 뮤직’ 같은 영화는 그 시절의 맑고 설레는 마음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그 영화를 보며 꿈을 꾸었고, 언젠가는 그 노래처럼 자유롭게 노래하며 살고 싶다고 소망했었다. 그 영화가 들려주는 노랫말이 지금도 귓가를 맴돈다. “Climb every mountain, ford every stream…” 우리 모두 각자의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며 여기까지 왔다.
해마다 봄이 오면, 교정 뒤편 송이송이 매달린 등나무 꽃 아래에서 손에 손잡고 사진을 찍던 장면이 아른거린다. 반짝이던 눈빛들, 수줍은 웃음, 가슴 뛰는 봄바람. 어제 동창회에서는 그런 순간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났다. 그날의 우리처럼 오늘의 우리도 참 아름다웠다. 주름진 손끝엔 세월이 새겨져 있었고, 미소 속에는 여전히 여고생 시절의 맑음이 남아 있었다. 추억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온기이고, 우리가 우리일 수 있도록 붙잡아주는 깊은 뿌리다.
오늘 아침, 어제의 여운을 안고 거울 앞에 섰다. 익숙한 내 얼굴 뒤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소녀가 있었다. 세상은 바뀌었고 몸도 달라졌지만, 마음만은 그 시절 그대로였다. 우리는 그렇게 추억을 먹고 산다. 기억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며, 내년에도 또 만나자고 다짐한다. 푸르디푸르렀던 교정의 히말라야시다를 추억하며 그 그림자 아래서 다시 모일 것이다. 등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시절의 추억 한 아름 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