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 심은 복음의 씨앗
1885년, 조선은 깊은 혼돈의 시간 속에 있었다. 왕권은 흔들렸고, 민심은 흉흉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지나간 자리는 외세의 그림자로 드리워졌고, 나라 안팎의 질서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백성들은 굶주림과 억압 속에 하루하루를 연명했고, 종교적 박해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이런 척박한 땅에, 낯선 한 외국 청년이 발을 내딛는다. 바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당시 27세의 젊은 미국 선교사였다. 모두가 피하고 싶은 조선이라는 광야를, 그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의 땅’으로 받아들였다.
언더우드는 세상의 안락함을 뒤로한 채 조선에 왔다. 외국인에 대한 경계가 극심했고, 말도 통하지 않았으며, 기독교는 ‘서양의 사악한 사상’이라며 멸시받았다. 심지어 마을 어귀에 들어서기만 해도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거나 아이들을 숨기곤 했다. 그는 그 벽 앞에서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두려움의 시선 속에 있는 백성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비가 절실히 필요한 존재라 여겼다. 그는 자신이 예언자처럼 된 듯 느꼈을 것이다. 광야에 홀로 선 이사야처럼, “주의 길을 예비하라”라고 외치며 복음의 문을 두드렸다.
낯선 땅에서의 하루하루는 영적인 투쟁이었다. 언어는 벽이었고 문화는 장벽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손에 들고 밤늦도록 불을 밝히며 조선어 성경을 번역했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글을 가르치며 복음의 문해력을 열어주었다. 그의 손끝에서 번역된 성경은 조선인의 눈과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언더우드는 “내가 기뻐하는 것은 사람들이 나를 칭찬할 때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될 때입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한 선교사의 소명 그 자체였다.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조선 땅에 임하도록 자신을 지워갔다.
그는 신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며, 복음과 교육, 의료의 통합된 사역을 펼쳤다. 세브란스 병원과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의 기초에는 그의 땀이 배어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업적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사람의 마음 밭에 심은 복음의 씨앗이었다. 누군가의 거친 언어 속에서 사랑을 발견했고, 누군가의 고된 삶 속에서 영혼의 갈급함을 읽어냈다. 그는 백성의 아픔을 품었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고, 함께 울었다. 이 모든 과정은 마치 겨울 땅을 갈아엎는 농부의 손처럼 느리고 고단했지만, 언더우드는 인내했다. 왜냐하면 그 땅은 하나님의 것이었고, 그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언더우드가 조선에 심은 씨앗은 열매 맺기 시작했다. 복음은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흘러갔다. 박해는 있었지만, 그보다 더 강한 하나님의 생명이 있었다. 언더우드는 이 땅의 ‘첫 번째 열매’를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지만, 그의 사역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가 뿌린 씨앗은 지금도 한국 교회 곳곳에서 자라고 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순종을 기억하며, 언더우드라는 이름 속에 담긴 헌신과 희생의 복음 DNA를 계승하고 있다.
나는 문득 묻게 된다. 오늘 우리는 누구의 광야에 들어가고 있는가. 복음이 필요한 그 땅은 어디이며, 나는 과연 언더우드처럼 주저 없이 나설 수 있는가. 언더우드는 대단한 인물이기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예’라고 응답한 사람이다. 그의 발걸음은 결국 복음이 사람을 살리고, 문화를 살리고, 민족을 일으킬 수 있음을 증명했다. 광야에서 외친 그의 한마디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 땅의 믿음의 선율로 남았고, 오늘 나의 마음에도 다시 불을 지핀다.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