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겨울바람은 언제나 바다 냄새를 머금고 섬의 언덕을 넘어온다. 칼날 같은 찬기 속에서, 열아홉 소년은 아무 말 없이 군화끈을 조였다. 머뭇거리던 어머니의 손이 옷고름을 비틀며 눈물을 훔치던 날. 그 마지막 모습은 여든을 훌쩍 넘긴 지금도 그의 가슴에 잔상처럼 남아 있다. 1951년 1월, 한창 피어날 청춘의 한가운데, 그는 그렇게 조국을 위해 전장으로 향했다.
육지에 닿자마자 들려온 총성은 피아를 가리지 않았다. 우레 같은 굉음과 함께 포탄이 땅을 갈랐다. 처음 마주한 전쟁은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쓰러지는 전우들, 뜨거운 피 냄새, 심장을 쥐어짜듯 다가오는 공포 속에서도 그는 고향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포탄 하나가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가까이 떨어진 파편에 고막이 찢어졌고, 그는 한쪽 청력을 영영 잃었다.
더 큰 시련은 그다음이었다. 적군에 생포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기차는 검은 연기를 뿜으며 국경을 넘어 황해남도 신천으로 향했다. 종착지는 탄광이었다. 이름 대신 ‘괴뢰군 43호’라는 번호로 불렸다. 포로는 사람도, 군인도 아닌 존재였다. 전쟁의 부상이 채 아물기도 전에 그는 석탄을 캐기 시작했다. 좁은 막장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돌을 부수며 하루를 보냈다. 얼굴엔 검은 탄가루가 덕지덕지 붙었고, 손바닥엔 굳은살이 박였다.
굶주림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먹을 것은 턱없이 부족했고, 그는 ‘떡 탄’이라 불리는 진흙 같은 흙을 씹으며 허기를 달랬다. 속이 망가져 토해내기를 반복하면서도 먹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기에 꾹꾹 삼켜야 했다. 지옥 같은 시간이 몇 해를 흐른 끝, 그는 결심했다. 반드시 살아 돌아가겠다. 반드시 나의 이름을 되찾겠다고.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넌 건 70세가 다 된 나이였다. 조국 땅을 다시 밟는 순간, 모든 고통이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탈북 이후 받은 정착금은 사기당했고, 몸도 늙고 병들어 일을 구하기조차 어려웠다. 77세의 노인이 된 그는, 다시 삶의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사회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국가도 품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말했다. “전쟁에 참전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조국이 위험하면 또 나설 겁니다.” 이 말이 얼마나 큰 고통을 삼켜야 나올 수 있는지, 우리는 짐작조차 어렵다. 백발의 노인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여전히 하루하루를 전장처럼 버티고 있다. 고통 속에서 꺼지지 않는 그의 조국 사랑은 어쩌면 이 시대의 마지막 애국일지도 모른다.
현재, 대한민국에 생존해 있는 국군포로 귀환 용사는 단 14명뿐이다. 이들 중 많은 이가 여전히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의료적 지원조차 충분하지 않다. 이들이 흘린 피와 땀 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쉽게 그들을 잊어가고 있다. 기념비적인 말로 포장된 ‘호국영령’이라는 단어는 때로, 현실의 처절함을 가리기 위한 포장지에 불과하다.
기억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그들은 결국 사라진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야 한다. 그의 이름은 ‘강희열’이다. 육십 년 넘게 자유를 기다려온 이름, 전쟁과 고통 속에서도 조국을 향한 사랑을 잊지 않았던 이름이다. 문득, 그의 말이 가슴을 친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로 버텼습니다.”
제주의 바람은 오늘도 불고 있다. 언젠가 그가 떠나온 그 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속삭인다.
“어르신, 당신의 이름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나라가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