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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say

잊을 수 없는 사람

by lee nam

평생을 무소유로 살아가셨던 법정스님은 인간의 만남이란 어떤 것인지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짧은 글에서 해답을 준다. 법정스님께서 지리산의 쌍계사에서 홀로 겨울을 나며 정진하실 때 수연스님이 홀연 찾아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출가한 사람은 서로 그들의 과거와 출가의 연원을 묻지 않는다고 한다. 그분들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의 만남이며 그 만남을 소중한 인연으로 간직하는 것이 전부인 것이다. 말없이 서로를 존중하며 밥하고 빨래하며 수양을 쌓을 즈음, 법정스님이 심한 감기를 앓자 수연스님은 교통수단도 없는 80리 길을 걸어 구례에서 약을 구해 오셨다. 그런 후 두 분은 서로 헤어지셨다. 이번에는 수연스님이 병약해져 요양을 하실 때 법정스님께서 손수 찾아가 병간호를 하고자 하셨지만 스님의 걱정에 찬 고집으로 일주일 만에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세상을 떠나신 수연 스님. 이런 스님을 생각하며 법정스님은 내심 그분에 대한 정을 간직하고 세상의 만남과 인연이란 혼과 혼이 마주치는 것임을 깨달으셨다고 한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나의 삶의 여정에서 만난 수많은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그 사람들 중에서 우리 네 아이들이 '그레샴 이모'라고 불렀던 한 분을 소개를 하고 싶다.

지금부터 33년 전 봄날, 그녀와 만난 것은 우리 교회에서 가까운 공원에서였다. 그날은 우리 교회 야유회 날이었다. 교인들은 점심 식사 후 둥글게 모여 앉아 함께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어른들의 놀이에는 관심이 없어 너무 지루해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마침 그때 한국 여자분이 웃음을 머금고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 한국 분이세요?" " 네 , 한국에서 온 지 석 달 되었어요." 데보라 엄마라고 해요. " " 그레샴이라고 해요." “ 아이고 아이들이 고만고만 아주 어리네요.” " 나도 미국 와서 이 세 아이들 키우면서 세월이 다 갔어요." 그분 아이들의 얼굴을 쳐다보니 그들의 외모에서 아빠가 미국 분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우리들에게 시원한 팥빙수 한 그릇씩을. 주었다. 그분의 첫인상은 친절한 삶이 몸에 베여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는 서로 주소와 전화번호를 주고받은 후 또 연락하자며 헤어졌다. 이런 인연을 맺은 이후 우리는 이름 대신 서로를 '데보라 엄마' ' 그레샴 이모'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아직 운전을 할 줄 몰랐다. 남편은 새벽에 일을 나가면 늦은 밤에야 돌아오곤 했다. 나는 한국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미국에 온 후, 아파트에 갇혀 아이들과 온종일 씨름을 하던 때였다. 외출이라고는 고작 온 가족이 주일날 한국 교회에 나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분을 알고 만났다는 것은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는 천사를 만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 번은 낮에 누군가가 아파트 초인종을 눌렀다. ' 우리 집에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구굴까? ' 3층 계단을 따라 내려가 보니 현관에 공원에서 만났던 그레샴 이모가 서계셨다. 그분은 나에게 갈색 봉지 하나를 건네주고는 쏜살같이 차를 몰고 달아났다. 집으로 올라와 봉지를 열어보니 샌드위치 다섯 개가 들어있었다. 마침 그때가 점심 때렸다. 나와 아이들은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었다. 그 후에도 점심때가 되면 거의 날마다 초인종이 울리곤 했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 야 , 신난다. 그레샴 이모가 또 왔다.” 하며 좋아라 소리쳤다. 어쩌다 그레샴 이모가 안 오시는 날이면, 아이들은 “ 엄마 그레샴 이모 언제 또 올 거야? 전화해 봐.” “엄마 전화번호 몰라" “ 너희들이 엄마 말 잘 듣고 있으면 그레샴 이모가 올 거야 말 안 들으면 안 오셔.” 하면 “ 그럼 엄마 말 잘 들을게. ” 하면서 그레샴 이모를 기다렸다.

그레샴 이모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점심때만 불현듯 나타나는 천사였다. 하루는 천사가 우리 아이들과 나를 도서관으로 데려다주었다. 천사는 먼저 도서관 잔디밭에서 싸 온 샌드위치를 먹있다. 그리고는 재빨리 우리를 도서관으로 데리고 갔다. 아이들은 그림책을 보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우린 도서관 카드를 만들고 책을 빌렸다. 아이들은 빌린 책들을 3주 후마다 다시 돌려줘야 했다. 그러자 그레샴 이모는 3주마다 점심을 싸들고 우리 집에 정기 방문을 하셨다. 우리 아이들은 매번 수 십 권의 책들을 빌려 왔다.


그로부터 3년 후 어느 날, 이모네가 미시간 주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레샴 이모는 직장에서 일을 하다 자신의 점심시간을 내어 우리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그분은 한국 남부 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에 와 살게 돼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미군부대의 한 미국 병사를 만나 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이라는 신천지에 왔다. 그 부부 사이에는 두 딸과 막내아들 하나가 있었다. 행복했던 순간은 잠시 뿐 그녀의 남편은 막내를 낳은 후 다른 여자를 만나 집을 떠나 버렸다. 푸른 하늘에 날 벼락같은 일을 만났지만 이모는 굳건한 신앙으로 씩씩하게 이겨나갔다. 하루에 세 직장에서 밤낮으로 일하면서 혼자서 세 아이들을 돌보았다.

세월이 흘러 그분이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 네 아이들은 이제 잘 자라 미국 주류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잘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그레샴 이모를 만난 인연의 결실이라고 믿는다. 그녀는 세 아이를 홀로 두고 밤을 낮 삼아 일하면서도 이웃사랑을 실천한 분이었다. 그분은 내가 발이 없을 때 발이 되어 주셨던 분이었다. 그녀는 나와 우리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잊을 수없는 ‘천사, 그레샴 이모'이다. 지금은 그분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오늘따라 유난히 그레샴 이모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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