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봄날이었다. 처음 우리 학교에 전근 오신 모두 정 선생님이 우리 반을 맡게 되었다. 선생님은 첫 시간에, “너희들 중에 서울에 가 본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 봐.”라고 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손을 든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잠시 후 " 그럼 너희들 광주에는 가본 사람은 있어?” 하고 물었다. 난 그 말이 떨어지지 마자 자랑스러운 듯 손을 번쩍 들었다. 당시에 우리 언니는 광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따라 광주에 가본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다시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들 서울 가보고 싶니?” 아이들은 너도 나도 손을 번쩍 들었다. 모두 서울에 가보고 싶다며 싱글벙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가을에 서울로 수학여행을 가기로 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서울 구경을 하기 위해 우리는 돈을 모으기로 했다. 그러나 산골 아이들은 돈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밥과 간식은 대부분 집에서 만들어 먹었다. 필요한 것은 부모님께서 읍내에 가서 사 오셨다. 나는 연필 같은 학용품을 사려면 계란을 들고 가면 살 수 있었다. 우리는 먼저 사육장을 만들어 분단별로 토끼를 기르기로 했다. 토끼를 길러 새끼를 낳으면 그것을 시장에 내다 팔아 학급 통장에 돈을 저축했다. 보리 추수를 할 무렵이면 전 학생들이 보리밭에 나가 보리 이삭을 주웠고, 가을이 되면 추수를 마친 논에 나가 벼 이삭을 주워서 교실에 둔 양동이에다 모았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모은 벼와 보리를 팔아 돈을 만들었고 토끼 새끼를 팔아 모은 돈은 나날이 불어났다.
드디어 11월이 되어 수학여행을 가는 날이 왔다. 우리는 능주 읍내로 걸어 나가 기차역에서 광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다시 광주역에서 내려 서울로 가는 기차로 갈아탔다. 산골 아이들은 기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서울 가는 부푼 마음은 금방 사라지고 기차 멀미를 하기 시작했다. 기차를 생전 처음 타본 나는 그 순간 너무나 깜짝 놀랐다.‘ 왜 기차가 가는데 나무가 뒤로 가는 것일까?’ 걸어서 다닐 때는 나무와 산이 제 자리에 있는데 차 속에 있으면 모든 사물들이 계속 움직이는 것이었다. 기차의 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논과 밭, 나무와 산들은 더 빠르게 뒷걸음치며 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친구들은 멀미를 하며 토하다 말고 의자에 이리저리 기대고 잠이 들었지만 나는 잠도 오지 않은 채 신기하기만 했다. 손바닥만 한 논밭만 바라보고 자란 나는 차창 밖으로 한없이 넓게 펼쳐진 들과 산들을 보며 신기하게 느껴졌다. 드디어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서울역 근처에 여관을 정하고 짐을 풀었다.
다음 날부터는 산골 아이들은 꿈에도 보고 싶었던 서울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흑백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었던 남대문을 구경했다. 우리는 대통령 가족이 사시는 청와대에도 들어가 보고, 중앙청 속에도 들어가 보았다. 거리에는 차가 얼마나 많은지 모두 다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푸른 숲 대신 여기저기에 솟아 있는 빌딩 숲을 쳐다보면 어질어질하기만 했다. 창경원과 경복궁 등의 고궁을 돌아보며 피곤한 줄도 몰랐다. 어미닭을 쫓는 병아리들처럼 선생님의 뒤를 열심히 뒤따라 다녔다. 말로만 듣던 남산을 올라갈 때는 케이블카를 탔다. 공중에 매어 달려 올라가는 케이블카 속에서 우린 행여나 떨어질까 봐 무서워 소리를 질렀다.
더욱 놀란 것은 남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밤 풍경이었다. 산골에서는 밤이 되면 깜박거리는 호롱 불을 켜놓고 살고 있는데 어둑어둑한 밤이 되자 온 서울은 네온사인의 반짝거림과 수많은 전깃불의 황홀한 출렁거림으로 빛의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서울이 그렇게 아름다운 도시인 줄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되어 너무나 기뻤다. 산골 아이의 작은 가슴속에서는 그날 밤 화려한 미래에 대한 꿈들이 무지갯빛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밝은 빛의 황홀한 새 세계를 보게 된 것이다.
나는 자라면서 그날 밤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날 밤 내 마음속에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었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다음에 크면 꼭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자라서 고등학교를 광주에서 졸업하고 서울 교육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 속담에 ‘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이 있다. 내가 그때 서울 수학여행을 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산골을 아직까지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 좁은 세상 속에서 우물 안 개구리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첫 서울 나들이는 내 생에의 수많은 여행 중 내 인생에 가장 영향력을 주었던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