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어느 날, 나는 한국에 사시는 중학교 1년 선배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여보세요, 저는 능주중학교에 함께 다녔던 정 OO라고 합니다. 혹시 박남이라는 분이세요? 그런데요? 박남 씨가 미국 시카고에서 사신다고 듣고 박남 씨 친정 동네에 찾아가 사촌 오빠로부터 전화번호를 알아냈습니다.” 나는 금방 그 선배님이 누구신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선배님 저수지 밑에 있는 금전리라는 마을에서 사셨지요?” “맞아요. 참 여전히 기억력 좋으시네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난 선배는 옛 첫사랑의 애인을 찾은 듯 꿈만 같은 모양이었다. 나도 금방 50년 전 중학생 때의 추억 속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금전리 마을은 우리 중학교에서 도보로 오리쯤 걸리는 거리에 있는 하동 정 씨 집성촌이었고, 우리 마을 한천리는 금전리에서도 십리를 더 깊숙이 저수지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야 나오는 함양 박 씨 집성촌이었다. 당시에는 버스가 없어서 새벽밥을 먹고 도보로 통학을 했던 때다.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은 각각 무리를 지어 학교에 갔다. 말만 남녀공학 학교에 다녔지 남학생 여학생 간에 말 한번 건네지 않고 지낸 사이였다.
정 선배가 내게 전화를 건 이유는 30년 전에 미국에 입양 간 딸을 찾기 위해서였다. 선배는 내게 자신의 딸에 얽힌 사연을 털어놓았다. “박 남 씨, 저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제가 전처와 이혼을 하고 지금 처와 재혼을 했어요. 그런데 전처와 저 사이에는 딸 하나와 아들 하나가 있었어요. 전처는 아들이 태어난 지 3개월 됐을 때 세 살짜리 딸만 데리고, 갓난아기를 홀로 뉘어 둔 채, 집을 나갔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처녀 때부터 좋아하던 남자 친구가 있었던 거예요.” “선배님, 참 힘드셨겠어요.” 하는 수없이 선배는 아들을 금전리 어머니께 맡겨 키웠다. 그 사이 선배는 재혼을 해서 딸을 하나 더 얻었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선배의 동생 여섯 명을 키우고 계셔서 선배의 어린 아들을 계속해서 길러주실 형편이 안 됐다. 그래서 둘째 아내가 딸을 낳고 난 후, 어머니는 선배 아들을 선배네 집으로 다시 보내셨다. 새 아내는 자기가 낳은 딸과 전처가 낳아 두고 간 아들을 함께 키우게 됐다. 그런데 전처가 떠난 지 일 년 후 어느 날, 어떤 아주머니가 전처가 데려갔던 딸을 선배네 직장으로 데려왔다. “은경이 엄마가 새 남편 사이에 아들을 낳아서 은경이를 더 이상 못 키운다고 친아빠한테 데려다주라고 해서 데려왔어요.” 하고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도망치듯 가버렸다. 하는 수없이 선배는 은경이를 데리고 집으로 갔다. 새 아내의 눈치를 보며 선배는 속으로 걱정을 하면서 금전리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사실을 말했다. 그런데 새 아내는 착하게도 자기가 이 세 아이를 함께 키우겠다고 하면서 은경이 머리도 빗겨 주고 목욕탕으로 데려가 목욕도 시켜 재웠다. 어머니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으신 후, 첫차를 타고 목포에 오셨다. “아이고 새 며느리가 힘들어서 애 세 명을 어떻게 키운다냐? 내가 금전리로 은경이를 데려가련다.” 어머니가 데려갔던 은경이는 일 년 동안 할머니, 삼촌 고모들과 잘 어울려 지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은경이를 책임지며 키우시기가 너무 힘에 겨웠다. 그래서 어머니는 은경이를 금전리에서 시오리 떨어진 은경이네 외할머니 집으로 보내셨다. 그 후 선배는 장모에게 전화로 은경이 안부를 묻곤 했다. 그때마다 장모는 잘 크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그렇지만 아빠인 선배는 딸이 짐짝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선배는 은경이가 다섯 살 되면 다시 집으로 데려와 학교도 보내고 두 아이들과 함께 잘 키우리라 마음먹었다
은경이가 다섯 살이 되던 어느 날, 선배 부부는 은경이를 데려오기 위해 전처의 친정집으로 갔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외할머니 집에는 은경이가 없었다. 선배가 장모에게 울부짖으며 은경이를 내놓으라고 애걸복걸해 보았지만 꼭 다물고 있는 장인 장모의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선배가 장모에게 파출소에 아동 유기죄로 신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은경이가 어디 있는지 캐물었다. 외할머니는 무서웠는지 은경이를 외삼촌이 경상도 부산에 데려다줬다고 했다. 외삼촌에게 자세히 물어보고 싶지만 외삼촌은 이미 군 입대를 한 상태라 더 이상 은경이의 거처를 알아낼 길이 없었다. 그래서 선배 부부는 다음날 무작정 부산으로 갔다. 우선 부산에 있는 고아원과 경찰서에 찾아가 보기로 했다. 한 경찰서에 들러 은경이의 실종 신고를 내놓았다. 인적 사항을 적고 은경이 사진을 실종 신고 지원서에 붙였다. 경찰은 그 지원서를 부산에 있는 모든 고아원과 아동 보호소에 보냈다. 경찰은 혹시 고아원이나 아동 보호소에서 연락이 오면 연락해 주겠다고 했다. 선배는 경찰의 약속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딸을 잃어버린 선배는 자식을 버린 아버지라는 자책감으로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산에 있는 경찰서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 아동 보호소에서 실종 신고서와 동일한 내용의 여자아이 정보를 보내왔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선배 부부는 은경이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부산으로 갔다. 경찰서에 들러 은경이가 있는 아동 보호소 주소를 받아 찾아갔다. 선배 부부는 원장님과 만났다. 원장님은 종이 반장짜리 미아 기록 일지를 차례로 넘기다가 은경이 것을 부부에게 내밀었다. 거기에는 은경이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얼굴은 분명히 맞는데 이름은 정윤경으로 적혀 있었다. 아이가 경찰에 의해 발견된 장소는 부산 공용버스 터미널 공중전화박스 앞이었다.
그곳에서 울고 있던 아이를 박 모 경찰이 아동 보호소에 데려다 맡긴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미아 기록 일지 마지막 부분을 보는 순간, 선배는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다. 결과 처리 란을 보니 “미국 입양”이라고 적혀있지 않은가? 선배는 눈앞이 깜깜해지며 현기증이 났다. 새 이름을 보니 미국명이 “Sandy A.”라고 쓰여 있을 뿐 종이를 샅샅이 훑어봐도 미국 주소나 정보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원장님은 샌디는 미국으로 입양됐으니 찾을 생각을 말라고 하면서 자기들도 미국 어디로 입양됐는지 전혀 모른다고 했다. 선배는 딸 대신 원장님이 카피해서 준 미아 기록 한 장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딸을 잃은 선배의 가슴은 자나 깨나 딸 생각으로 꽉 찼다. 어쩌다 비행기 소리만 들려도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며, ‘저 비행기를 타고 가면 우리 딸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야 이건 부질없는 내 넋두리지.’ 혼자 중얼거렸다. 그때마다 속에서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딸아이 또래의 여자아이들만 봐도 가슴이 아파서 보던 화면을 꺼버리기도 했다. 새 학기가 시작하는 철이 되면 은경이 생각이 더 났다. 길을 가다가 젊은 부부가 아이들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걷는 모습만 봐도 가슴이 찡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무색했다. 차라리 딸이 죽어서 무덤에 묻혀 있다면 아예 이 세상에 없으니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누군가에게도 딸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도 없는 못난 아비인 자신을 원망했다. 다만 미국 어디에 살더라도 은경이가 무사하기를 마음속으로 빌뿐이었다. 한편 선배님의 기가 막힌 긴 사연을 들은 나도 가슴이 너무 아팠다. “선배님,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은경이를 찾게 해 주실 거예요. 은경이는 미국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거예요. 저도 은경이를 찾도록 계속 기도할게요.” 나는 선배를 위로하기 위해 듣기 좋은 말을 했지만 어느 주에 사는지, 주소나 전화번호 하나 없이 오직 정윤경이라는 한국 이름과 Sandy A.라는 미국 이름과 20년 동안 꼭 간직해 온 미아 기록서 달랑 한 장만 가지고는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배의 전화를 받고 난 후, 세월은 십 년이 흘러갔다. 인터넷과 4차 산업혁명으로 지구촌은 실시간 삶의 공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카카오톡 대화방, 화상 무료 전화, 줌, 스마트폰만 가지면 온 세상과 소통하고, 필요한 모든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됐다. 50년 전의 초등학교 카톡방, 중고등학교 친구들의 카톡방, 대학교 동창들의 카톡방, 교회 구역원 카톡방 등 내가 속해있는 모든 모임이 과거와 현재의 구별이 무너진 채 생겨나고 있었다. 너무 많은 카톡이 하루에도 수십 개 수백 개가 떴다. 다 읽고 댓글을 달기도 불가능했다. 모르는 사람 이름이 뜨면 지워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나는 카톡방 정리를 하다가 한 사람의 이름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정 OO” 바로 10년 전에 미국에 입양된 딸을 찾아 달라고 부탁한 중학교 선배의 이름이 아닌가? 나는 곧바로 한국의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은경이 이야기를 꺼냈다. 은경이 나이가 서른다섯 살이라며 다섯 살부터 지금까지 잃어버린 딸의 나이를 세고 있었다. 한국에서 키운 두 자녀는 결혼해서 아들딸 낳아 잘 살고 있다고 했다. 선배 부부는 더 이상 은경이를 찾는 것을 단념하고 은경이를 호적에서 행방불명 처리를 해버렸다고 했다. “선배님, 우리 은경이를 평생 못 본다고 해도 자식을 위한 기도는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데요. 우리 함께 기도해 줍시다.” 간곡한 위로의 말을 전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 후로도 선배는 은경이에 대한 그리움을 개인 카톡으로 보내왔다. 부모 자식 간의 천륜의 정은 호적에서 지워낼 수는 있어도 가슴에서는 지워버릴 수 없는 것 같았다.
온 세상은 코로나 전염병으로 인해 꽁꽁 얼어붙기 시작했다. 나라와 나라, 개인과 개인 사이사이를 갈라놓았다. 교회의 예배도, 식당도, 결혼식장도 다 문을 닫았다. 뉴욕 같은 곳에서는 죽어가는 시체들을 주체할 수 없어 냉동 트럭에 넣어 보관 처리했다. 텔레비전만 켜면 연일 그 모습이 방영되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람인 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온 세계가 순식간에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다. 우리 직장 출입구에도 날마다 죽은 자의 사진이 게시되었다. 사람들은 집에 갇혀서 SNS, 소셜 미디어를 통해 소통하며 답답함을 풀었다 재작년 가을 어느 날, 내 머릿속에 섬광처럼 번쩍이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페이스북이나 구글 검색을 해본다면 은경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 은경이 나이가 서른다섯, 미국에서 자랐으면 페이스북쯤은 이용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곧바로 페이스북 검색창에 “Sandy A.” 하고 쳐보았다. 수많은 이름들이 떴지만 미아 기록서의 정보만 가지고는 누가 누구인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했다. 다시 구글 검색창에 이름을 넣어 보았다. 그런데 나는 깜짝 놀랐다. 샌디의 정보가 간단하게 게시돼 있었다. 가슴이 쿵쿵 거리며 박동 소리가 느껴졌다. 샌디가 바로 시카고에서 멀지 않은 미시간에 살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녀의 웹사이트 주소까지 소개되어 있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면서 샌디의 웹사이트를 열어보는 순간 함성을 질렀다. “은경이다. 샌디를 찾았다.” 게시된 사진의 얼굴은 선배를 꼭 빼닮아 금방 선배의 딸이란 확신이 왔다. 그녀는 미시간에서 자라 미시간 대학의 화학 교수가 돼 있었다.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 게다가 현재의 집 주소까지 볼 수 있었다. 건장한 백인 남편과 두 딸들이 함께 찍은 환한 가족사진을 보니 답답했던 내 마음이 뻥 뚫렸다.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을 안은 채 나는 미시간 대학 샌디에게 전화를 걸어 시카고에 살고 있는 아빠의 중학교 때 친구라고 나를 소개했다. “너를 낳은 아빠가 널 찾고 있다.”라고 전했다. 샌디는 근무 중이니 퇴근한 후에 전화를 걸겠다고 했다. 한국 시간은 깜깜한 밤이었다. 나는 지체 없이 무료 카톡 전화로 잠든 선배를 깨우고 말았다. 자다 깨서 내 전화를 받는 선배의 목소리는 깜짝 놀란 듯했다. “아니, 이 밤중에 뭔 일 이오?” “선배님, 은경이를 찾았어요.” “아니 뭐라고요?” “선배님 딸 은경이를 찾았다고요. 은경이는 미시간에서 자라 미시간대학교 교수가 됐어요. 그리고 결혼까지 해서 두 딸의 엄마가 됐어요.” 자다가 깨서 꿈만 같은지 선배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선배님, 내일 또 서로 연락해요. 잘 주무세요.” 그날 나는 내 딸을 찾은 듯 매우 기뻤다.
은경이를 찾게 된 순간부터 내 직업은 통역사, 교환원이 되어버렸다. 한국과 미국은 밤과 낮으로 시차가 달랐고, 미시간과 시카고도 시간대가 달랐다. 그러니 나는 일도 해야 하고 세 시간대를 동시에 살아내야 했다. 시차, 거리, 언어의 장벽과 함께 모든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어 아빠와 딸의 소통을 도와야 했다. 하루는 선배에게서 은경이에게 뭘 좀 물어봐 달라는 카톡이 왔다. 얼굴 모습이 어렸을 때 모습과 비슷하기는 한데 그래도 꼭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선배가 전처와 함께 살 때, 은경이가 뜨거운 물에 데어서 오른쪽 허벅지에 커다란 흉터가 생겼다고 했다. 그러니 은경이 허벅지에 흉터가 있는지 확인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은경이에게 전화를 걸어 흉터가 있다는 답을 받았다. 은경이는 허벅지에 있는 흉터를 사진으로 찍어 내게 보내왔다. 어렸을 때보다 흉터는 더 넓어졌지만 아주 희미해졌다고 했다. 나는 그 사진을 선배한테 보냈다. 사진을 받아본 선배는 딸을 찾은 것이 이제야 실감이 나는지 “박남 씨, 내 평생의 한을 풀어줘서 줘서 고마워요.” 하면서 한국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했다. 그날 밤 나는 선배네 가족 카톡방을 만들었다. 가족 카톡방을 이용하니 내 일이 훨씬 쉬워졌다. 시도 때도 없는 전화 연락과 통역으로 지지난해 가을 석 달 동안 내내 잠을 제대로 못 잤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이 조금도 귀찮게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선배네 가족의 소통을 위해 함께 노력하면서 큰 보람을 느꼈다. 가족 카톡방의 방장이 된 나는 양쪽에서 써놓은 사연을 번역해서 각자의 언어로 써 놓았다. 그리고 단체 화상 가족모임을 하면서 영상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한 동안 화산에서 용암을 뿜어내는 듯한 허니문 시기가 계속되었다. 나는 선배와 은경이에게 구글 번역기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선배네 가족 카톡방에서 나왔다. 그 후 그들은 나 없이도 자기들끼리 자유자재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재작년 10월 25일은 은경이가 서른여섯 살이 되는 생일날이었다. 은경이를 찾은 지 꼭 1년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 선배 부부는 생일 선물로 은경이 부부와 두 딸들에게 화려한 한복 한 벌 싹을 선물했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 은경이는 내게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온 가족이 한복을 차려입고 화려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활짝 웃고 찍은 사진이었다. 딸과 아빠가 만난 지 일 년 반이 되어간다. 아빠와 딸은 당장에라도 한국과 미국을 오고 가고 싶었다. 그러나 무서운 코로나 방역으로 인해 때를 기다려야 했다. 여기저기 길거리에 쌓인 눈 더미가 녹아내리고 있다. 앙상한 가지 끝에도 파릇파릇 새 싹들이 돋고 있다. 32년 동안 꽁꽁 얼어붙어 있던 선배네 가족에게도 새봄이 왔다. 이번 여름 방학 때 은경이네 가족은 한국 방문을 하게 된다. 미리 아빠와 딸의 유전자 검사를 해서 친자 확인이 됐다. 아빠와 딸이 만나는 광경을 상상해 본다. 은경이는 치마를 확 걷어 올리고 오른쪽 허벅지를 아빠에게 보여줄 것이다.” 아빠, 여기 내 흉터 좀 보세요. 아빠, 나는 아빠의 딸 은경이 맞죠?” 하면서, 어린아이처럼 아빠의 품 안에 안길 것이다. 은경이 몸에 있는 흉터는 더 이상 딸과 아빠의 상처일 수 없다. 은경이의 흉터는 더 이상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 몸에 크고 작은 흉터 하나쯤 감추고 산다. 누구나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와 흉터를 보이지 않는 마음속 깊은 곳에 꼭꼭 묻어 놓고 산다. 흉터는 우리가 인생의 길목을 지나오면서 남겨진 상처의 흔적이다. 흉터는 성공의 이면에 숨겨진 자랑스러운 흔적이다. 흉터는 상처를 딛고 일어선 자에게 찍힌 승리의 마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