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이 산문이어서 다행이야

주역 에세이

by 고시린


늦가을의 휴일 아침, 한가하고 싶어 동네를 산책했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 주민센터를 지나니, 이면도로 옆으로 마른 단풍 수북한 보도가 널찍하다. 계절의 축복을 받은 길 위에서 가슴이 트인다.

가볍게 뛰어볼까.


등에 맨 배낭을 두 손으로 다잡고 슬쩍 속도를 높이자, 앞에 걷던 노부부가 뒤를 돌아보곤 흠칫 놀라 같이 뛰기 시작한다. 그리곤 손목시계를 본다. 이내 속도를 늦추고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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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십 미터 앞에 성당이 보인다. 부부는 나를, 미사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황급히 뛰는 동네의 동료 가톨릭 신자로 착각했던 거다.

집을 나와 고작 15분이 지났을 뿐인데, 이런 ‘사건’들이 생긴다. 재미난 소설 한 편처럼, 우리들의 하루는 어떻게 전개될지 모른다. 어릴 적 들었던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오늘은 어떤 일이 숨었다 나타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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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 산문이어서 다행이다.

그 사실을, 너무 자주 잊는다.


살다가 안 좋은 일이 겹치면 우리는 단순해진다.

세상은 왜 나를 괴롭히기만 하는 걸까.


그러면서 세상사를 둘로 나누기 시작한다. 나에게 유리한 일과 불리한 일, 나를 기쁘게 하는 일과 낙담하게 하는 일만 남긴다. 내 주위의 사람들도 적과 친구로 구분한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만 남고, 세상은 사라진다. 사건과 상황이 증발하고 나면, 세상과 나는 서로 무관한 사이가 된다. 내게 적대적인 세상보다 더 무서운 게, 내게 무관심한 세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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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무관심과 나의 무심은 그러나, 내가 간밤의 자학을 떨쳐내고 문밖으로 한 걸음만 내딛으면 바로 사라진다. 현관 밖에는 유/불리, 친구/적으로 분류되지 않는 ‘사건’들이 피고 지는 중이기 때문이다. 번잡한 도심을 지나는 차량의 창밖 풍경처럼 그렇게 쉼 없이…….


그 사건들이 모여 떠들썩한 산문을 써내려 가는 중이고,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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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마음으로 노부부와 성당 앞을 지나치자마자, 작은 공원이 나타난다. 새벽잠 적은 노인들이 운동 기구를 밀치고 잡아당기며 열심히 근력을 키우는 중이다. 공원을 지나쳐 재래시장 입구에 들어서자 정겨운 대화가 들려온다.

- 가게 문 며칠 안 여시는 거 같던대요?

- 아, 몸이 안 좋았어. 오늘부터 다시 열어.

- 너무 다행이에요.


시장에 들어서니 이제 갓 진열된 떡과 빵과 각종 반찬이 저마다의 향과 색을 뽐내는 중이다. 싱싱한 수산물이 담긴 낮은 궤짝들이 진열대 위에 배열되고, 말갛게 붉은 고기들을 손질하는 상인들의 몸짓도 기민하다.


장 보러 나온 건 아닌 게 분명한, 물건을 살 의도가 없어 보이는 만행의 산보객을 바라보는 상인들의 눈빛이 가끔 퉁명스럽다.

빨리 빠져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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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철학책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존재와 비존재를 가르지 않아서, 선과 악을 가르지 않아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만 가르고 있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다.


세상이 과학책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잴 수 있는 것과 잴 수 없는 것을 나누려고 하지 않아서, 숫자와 공식으로 환원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려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세상이 다양한 사람과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건들을 품고, 유장하게 흐르는 산문이어서 다행이다. 세상을 지배하려는 당위와 가치를 시시각각 밀어내면서, 즐겁고 간절하고 애절한 사연들을 쉬지 않고 만들어내는 공간이어서 다행이다.

이 세상이 산문이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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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이 있어 다행이다.


주역은 무수한 ‘사건’들의 집합이다. 첫 번째 건(乾) 괘가 마지막 미제(未濟) 괘로 향하는 동안, 고대인들의 전쟁과 사랑과 만남과 이별과 기쁨과 슬픔이 단문의 ‘메시지’로, 주역의 좁은 회랑을 흐르고 또 흐른다.


주역이 지금도 낡지 않는 수천 년 전의 사연들로 채워져 있어 다행이다. 끊임없는 변하는 세상을 온몸으로 닮고 있어 다행이다.


이 세상이 단조롭지 않다는 사실을, 이 세상을 유/불리, 비관/낙관으로만 재단하고 바라봐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니 다행이다.


세상도, 주역도 모두,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처럼, 쉬지 않고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는 산문이어서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