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른이라는 이름의 무게 -
진주정신(晋州精神)의 실천, 이름 없는 기부
‘어른’이라는 단어가 점점 가벼워지고 있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말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잊히게 되는 사회이다.
세상에 존경이 사라진 자리에, 말은 많고 행동이 적어진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
TV를 보면 거친 입과 화려한 말로 선거에서 이기려는 자들의 모습만 보인다.
그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우연히 넷플릭스에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를 보았다.
진주라는 좁은 지역사회에서 김장하 선생님의 이야기는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다큐멘터리에서는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릴 적 내가 살든 집과는 불과 직선거리 100여 미터의 거리에 ‘남성당한약방’이 있었다. 김장하 선생님은 인쇄업을 하면서 사회사업을 하던 선친과는 잘 아는 사이였고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주요한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아는 분들이다. 젊은 시절에 나도 자연스럽게 남성당 한약방에서 보약도 지어먹었다. 우선 값이 싸고 싼 가격에 비해 약효는 비싼 보약에 뒤처지지 않았다. 그래서 늘 그 한약방에는 문전성시였다.
선친께서는 동네 이웃 같은 김장하 선생님과 잘 지냈으며 파성 설창수 선생님, 은초 정명수 선생님, 김장하 선생님 이런 분들과 어울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선비의 기상과 나눔과 베풂의 진주정신(晋州精神)이 몸에 스며든 것 같다. 김장하 선생님은 "돈이란 똥과 같아서 모아두면 악취가 진동을 하지만 밭에 골고루 뿌려주면 거름이 된다"라고 하셨다. 김장하 선생님은 진주사람들에게 DNA로 존재하는 진주정신(晋州精神)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실천하신 분이시다.
선친께서도 평생을 가족의 행복이나 재산증식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평생을 진주성과 촉석루, 논개를 위해서 사신 분 같았다. 그래서 장남인 나는 동생들에게 우스개 소리로 "우리는 독립군의 자식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하자"라고 했던 기억이 있고 우리 인쇄소의 직원들은 우스갯소리로 "촉석루 다리가 하나 부러져야 사장님이 더 이상 진주성에 안 가지~"하곤 했다.
진주에서 60여 년간 살아오면서 선친에게서 진주정신(晋州精神)이란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진주정신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려주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 주관적인 입장으로 정리를 해보았다.
< 진주정신(晋州精神)의 세 축, 진주성 전투와 형평운동 그리고 부(富)의 분배 >
1592년 임진왜란 때, 진주성은 김시민 장군과 3,800명의 병사로 왜군 2만을 막아낸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김시민 장군은 전사하였고, ‘함께 죽더라도 항복은 없다’라는 그 결연한 의지와 함께 진주성은 군사 요충지를 넘어서 백성의 항거와 자존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1593년, 두 번째 진주성 전투 두 번째 공격에서 성은 함락되고, 7만여 명의 백성과 군사가 학살당한다. 그 잔혹한 비극 속에서도 진주의 백성들이 끝까지 저항했고 진주정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존의 혼'이었다.
진주의 형평운동(衡平運動)은 1923년 4월 25일, 경남 진주에서 시작된 백정(도축업 종사자) 등 천민 출신 계층의 평등권 운동이었다. 당시 백정들은 이미 경제적으로 상당한 자립을 이루고 있었지만, “이름을 부를 수 없고, 자리를 같이할 수 없는” 신분적 멸시 속에 살아야 했으며, 진주 지역 인사들이 모여 조선형평사를 결성, “우리는 사람이다”라는 외침을 통해 권리를 주장했다.
형평운동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매우 뜻깊은 장면을 이룬 차별 철폐와 평등 권리 실현의 첫걸음이었다. 이는 단순한 사회 운동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일어선 양심의 봉기였다. 그 정신은 지금도 진주정신의 큰 축으로 살아 있다.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은 조선시대부터 만석꾼과 천석꾼이 모여 살던 전통적인 부자 마을로 알려져 있다. 이 마을은 특히 LG그룹의 창업주 구인회,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 효성그룹의 창업주 조홍제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기업 창업주들을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모두 지수초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이 학교는 한때 대한민국 100대 재벌 중 30명을 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배경은 승산마을이 단순한 부의 축적을 넘어 기업가 정신의 산실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이러한 인물들의 삶은 단순한 부의 축적을 넘어,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와 기업가 정신의 실천으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구인회는 지역사회 교육 발전을 위해 연암공업대학(현 연암공과대학교)을 설립하고 진주시립 연암도서관을 짓는 등 사회공헌에 앞장섰다.
부자들이 부를 축적을 넘어 지역사회에 이바지하여 기업가 정신을 실천한 것은 진주정신의 현대적 구현으로 볼 수 있다.
< 진주정신의 맥락은 나눔의 삶으로 실천된 정신입니다. >
‘진주정신(晋州精神)’이라는 말은 단지 지역의 자긍심이나 정체성을 넘어서,
조선의 의병 전통, 민중의 자존, 문화와 교육의 깊이가 응축된 정신적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에서 비롯된 뿌리가 깊습니다.
진주정신의 기원과 의미는 진주성의 항전 – 의로움(義)의 불꽃으로 ‘함께 죽더라도 항복은 없다’는 그 결연한 의지이며 그때부터 "의로움"이 진주의 정신으로 새겨졌습니다. 국가와 백성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자세 의로움(義)의 정신. 민중의 힘과 참여, 교육과 문화의 깊이가 모여 진주정신이 되었으며 논개와 김시민으로 상징됩니다.
진주성에서 몸을 던진 논개의 결연함,
왜적에 맞서 싸운 김시민 장군의 결기,
사익보다 정의를 좇았던 김병로 대법원장의 고매한 지조,
평생 이름 없이 장학금을 나눈 김장하 선생의 조용한 헌신,
그리고 기생 산홍이 지었던 시 한 구절의 부끄러움조차,
그 모두가 진주정신의 결이요, 의지입니다.
< '말없이 베푼 삶'이 주는 깊은 울림 >
《어른 김장하》는 단순히 한 사업가의 전기를 그린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람답게’ 살 것인가,
어떻게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조용하고도 강력한 울림이었습니다.
김장하 선생님은 생전 단 한 번도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았고,
수십 년 동안 익명으로 수많은 장학금을 기부했습니다.
그 침묵 속에 담긴 진정성은 오늘날 과잉된 말과 과시의 시대에서
마치 깊은 샘물처럼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화려한 말보다 더 묵직한 "침묵의 힘", 그리고 "숨은 선행의 깊이"에 마음을 내려놓게 됩니다.
‘진짜 어른’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됩니다.
‘어른’이란, 누가 보지 않아도 묵묵히 할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드라마 속 우리에게 익숙한 한 등장인물은 김장하 선생님에게 묻습니다.
"선생님께 받은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겠는지요?" 하니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 사회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사회에 갚아라. "
< 한 사람의 선한 의지가 지역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감동 >
그는 경남 지역의 교육을 위해 수백억 원(110억 원 상당)을 기부했지만,
사진 속의 선생님의 모습은 늘 제일 가장자리를 잡고 앉으셨습니다.
그 삶은 '나 하나 잘살자'가 아닌,
'함께 살아야 한다'는 믿음의 실천이었습니다.
그가 추구한 건 명예가 아니라 ‘다음 세대의 빛’이었습니다.
그는 교육은 나라를 살리는 가장 본질적인 일이라고 믿고 실천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해방 후 10대 시절부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돕기, 형편 운동가 강상호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주고 그 비석 뒷면에 '작은 시민'이라는 글씨를 몰래 새겨 넣었습니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 쉼터, 진주신문 후원, 독립운동 후손 지원 등 굵직한 시대정신을 실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자신의 이름을 내걸지 않았습니다.
그 뿌리 깊은 겸손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유명해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조용한 행보는,
오히려 세상에 가장 강한 메아리로 남게 되었습니다.
소리 없는 사랑, 이름 없는 헌신, 그리고 자기 삶을 시대에 내어주는 선택.
그 삶은 ‘존경’이란 말을 무겁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어른다움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나는 과연 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사람인가?
나의 존경은 말로만 존재했던 건 아닐까?
김장하라는 사람은 ‘불빛’이 아니라 ‘그림자’처럼 조용히 남은 사람.
그런 어른을 잃어가는 시대의 허전함.
누군가에게 '어른'이 될 수 있는 길은...
어쩌면 말 한마디보다 작은 양심 하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깨달음을 얻은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
< 우리네 부모님의 삶, 진주정신의 또 다른 얼굴 >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한 마을에서 아이 하나 사람답게 키워내기 위해
논밭을 일구고, 입술 깨물며 허리를 굽히던
어머니, 아버지의 수십 년 세월은 어쩌면
진주정신의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숭고한 실천이 아닐까 하고요.
한 줄 불평 없이 자식을 위해 살아낸 삶.
당신의 배고픔이 내 포만이 되었고,
당신의 허기진 등에서 나는 온기를 얻었습니다.
부모님들의 인생은 늘 무대 뒤였지만,
그 침묵은 오히려 가장 우렁찬 가르침이었습니다.
표지사진 설명: 진주에는 문산성당이 있습니다. 문산성당은 1896년, 진주 지역 최초의 본당으로 문산성당이 세워진 것입니다. 문산성당은 단순히 신앙의 공간을 넘어 한국 근대사와 천주교 전파의 역사 속에서 의미 깊은 자리를 차지하는 성지입니다.
문산성당은 조용합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무겁고 깊습니다. 그것은 탄압 속에서도 지켜낸 신앙, 낯선 땅에 뿌리내린 복음, 그리고 세대를 건너 살아남은 진실의 무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진주에 살면서 진주정신을 실천해 온 아버지와 선조들을 위해 문산성당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