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900살 은행나무였습니다.
경상도를 덮친 대형산불로 수령이 900년에 이르는 경상남도 기념물인 하동 '두양리 은행나무'가 불에 탄 것으로 확인됐다. 두양리의 은행나무는 경남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로 고려시대 강민첨(963∼1021)이 심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AI의 도움을 받아 비통한 심정을 은행나무의 입장에서 옮겨보았다. 그리고 나는 하동 옥종 두양리 은행나무를 찾아가서 이 시를 읽어주었다. 세상의 모든 사물에는 영혼이 있다고 믿는 인디언의 풍속을 생각하면서...
북미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세계관 중 하나로 애니미즘(Animism)이라 불리는 신앙체계는 자연의 모든 존재—돌, 나무, 강, 바람, 동물, 심지어는 인간이 만든 물건들까지도—각각 영혼 또는 영적 존재(Spirit)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 사상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연과 인간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 공동체라고 여기고, 모든 존재를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려 하고 있다.
< 나는 은행나무였습니다 >
나는
천년 안개 너머, 고요히 잠든 옛 시절
고려의 바람 속에
이곳에 뿌리내렸습니다.
임진왜란의 칼날과 함성이
하늘을 삼키던 날에도
나는 꿋꿋이 서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의 포성과
불꽃이 스쳐가도
나는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발자국이 다가와서
기도하는 손이 내 몸을 어루만질 때마다
나는 그 자리에 있어 주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러나 누구보다 오래
전쟁도, 눈보라도
다 지나가면 봄이 왔고
나는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다시 사람들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숨조차 쉬지 못할 불이
하늘과 땅을 한꺼번에 삼켜
나의 수백 해,
천년 가까운 기억을
한순간에 태워버렸습니다.
나는 외마디 비명조차
끝내 내지 못하고
검은 연기 속으로
쓰러졌습니다.
아직도
나를 기다리는 이가 있을까
내 그늘을 기억하는 아이가
살아는 있을까
나는 이제
그 누구의 발길도 들리지 않는 숲 속에
재가 되어 누워 있습니다.
나는
은행나무였습니다
천 년을 기다렸지만
이젠… 다시 봄을 피울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