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도보관광해설을 위한 조선왕조실록 정리
서울도보관광해설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행코스이다. 서울의 도보관광해설을 위해서는 조선의 건국과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아는 것이 기본바탕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학창 시절에 공부했던 조선왕조의 흐름과 근현대사를 공부하고 있다. 학창 시절에는 무조건 외우기만 했다. 국사란 그렇게 연도와 중요 사건만 외우면 되는 줄 알았다. 주입식 교육이 낳은 최대의 피해는 국사라는 과목은 지루하고 암기만 해야 하는 재미없는 과목이었던 것이다. 역사란 객관적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으므로 여러 역사학자의 견해를 보고 내 생각도 넣어 보았다.
< 후대(後代) 왕의 업적은 선대(先代) 왕의 거름으로 이루어졌다. >
“태정태세 문단세 예성연중 인명선 광인효현 숙경영 정순헌철 고순” 참 많이 외웠다.
그런데 다시 공부해 보는 국사는 역사적인 사건 속에는 필연적인 요인이 있어 그렇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대왕과 후대왕에는 아주 연결관계가 강해 후대왕이 위대해지는 것에는 필연적으로 선대왕의 노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애민, 계몽군주 세종대왕이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룬 것은 태종 이방원의 피를 묻힌 칼이 있었기 때문이고, 정조가 절대군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 영조의 가르침과 '한중록'의 저자이자 어머니인 헌경왕후 홍 씨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개국과 개혁의 물결이 넘쳐나던 1863년, 고종이 보위를 시작하던 시절부터 아버지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는 부모 자식을 넘어 35년동안 정적(政敵)이 되어 버렸다. 얼마나 사이가 나빴는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일본에서는 시아버지의 계략으로 몰고 가려고 했으며 아들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만일 흥선대원군이 후대왕 고종의 조력자가 되어 고종이 개혁할 수있도록 거름이 되어 후원과 조언만 하였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 후 고종은 황제의 나라라는 의미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새로운 국호로 선정하였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백성들의 나라라는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 많이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나라가 번성했던 왕의 성향은 성리학에 매몰되지 않고 실용적인 학문을 중시했으며 애민사상과 개혁적인 사상이 많은 왕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이 중국의 한자 대신 한글을 창제한 것이나 정조가 정약용의 실용사상을 인정하여 성리학에 반하는 천주교 신자임에도 정약용을 등용하여 수원화성을 완성한 것이 좋은 예이다. 반면 개방개혁의 기로 섰던 1860년대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펼치면서 무리하게 경복궁 중건과 쇄국정책을 펼친 것이 국가의 운명을 가르는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왕권강화를 위해 베르사유 궁전을 만든 것과 절묘하게 오버랩 된다.
반면 광해군은 선조인 선왕의 행동에서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광해군이 이 시대에 새롭게 조명을 받는 이유는 동의보감을 간행하게 하는 등 많은 서적을 편찬, 대동법으로 민심을 달래는 애민정신과 급변하는 명과 후금의 국제정세에 중립외교를 펼쳐 실리적인 외교를 하였다는 점이다.
< 붕당정치(朋黨政治)보다는 공존을 위한 민주적(民主的) 토론을 했어야... >
붕당이 시작된 시점은 선조임금부터라고 한다. 요즘에도 정당 간의 의견차이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조선시대 당파싸움이 가장 치열한 시기는 현종, 숙종 대이었다. 현종 때 있었던 ‘예송논쟁’과 같은 장례절차를 두고 명분을 위한 싸움으로 주요한 국가적 문제는 뒤로하고 자신들의 주도권싸움에 몰두하고 있었다. 숙종 대에는 세 번의 환국이 일어나 서인과 남인 사이에 몇 차례 피바람이 불었다. 권력을 독차지하는 과정에서 한쪽이 다른 쪽 붕당 신하들의 관직을 빼앗거나 유배를 보내고 사약을 내리는 식의 보복을 했다. 붕당정치를 하는 것과 토론과 논쟁을 벌이는 민주주의와 유사하게 보이지만 보복과 복수가 연결되어 진정한 민주주의로 연결되지 못하고 붕당정치가 되고 만다.
미국의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 하버드 대학 교수는 한국의 비상계엄과 탄핵 사태를 두고 "한국의 정치가 위험할 정도로 양극화돼 있음을 세계에 알린 사건"이라면서 한국은 민주주의가 무너진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될 뻔했다고 했다. 민주주의가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평화적 정권교체의 유일한 제도이며 민주주의는 관용과 제도적 자제로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한 세기 넘게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지켜본 104세의 원로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모든 선진국가들은 이후 좌·우를 벗어나 각각 진보와 보수로 바뀌었다. 좌·우일 때는 하나만 남고 다른 하나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진보·보수로 성장해서는 ‘공존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열린 보수’ ‘열린 진보’로 바뀌면 공존이 가능하게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김형석 교수는 국가 발전 3단계가 있다고 한다. 첫 단계는 권력국가, 2단계는 법치국가, 그리고 가장 이상적인 단계는 질서국가이다. 질서국가란 도덕적 가치과 윤리적 상식이 지배하는 국가인데 한국은 계엄사태로 인해 질서국가로 아직 진입하지 못한 채 권력국가로 역행할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이번 계엄사태를 보면서 정치적으로 역행하는 후진의 형태를 띠어도 위기에 대응하는 국민들의 질서 있는 시위를 보면서 민주적인 해결이라는 좋은 사례를 남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 우리에게도 개혁과 개화의 기회(機會)는 있었다. >
- 메이지 유신처럼 정부에서 하는 개혁과 개방 -
근대기에 앞서 정조 왕조에 강력한 왕권과 실학자 정약용을 중심으로 개혁과 개방 정책을 계속이어 갔다면 한국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붕당정치로 인해 권력을 독차지하려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국이 순조, 헌종, 철종으로 이어져서 국제정세에 어둡고 개혁의 길은 요원하여 망국(亡國)으로 이어진 것 같다는 의견도 있다. 정조 시절 프랑스에서는 대혁명(1789년)이 일어나서 사회가 개혁되고 왕권에서 민주주권으로 넘어가는 대 변화의 시기였음에도 정조가 승하한 후 우리는 당파싸움과 세도정치로 국제정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루이 14세가 베르샤이유 궁전을 지어 나라의 재정이 파탄나고 프랑스의 대혁명의 단초를 제공한 것과 유사하게 흥선대원군도 경복궁을 복원하여 왕권을 강화하려하였다. 이후 정치9단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치로 민심을 달랬고 개혁과 개화의 타이밍을 놓쳤다.
- 프랑스 대혁명 처럼 민중들에 의한 개혁 -
농민동학혁명(1894년)의 원인이 된 사건은 불평등한 개방의 위협을 받은 강화도 조약에서 일본으로 쌀(米穀) 유출이 조선에서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난 것이 주요한 한 원인 중 하나였다. 동학농민혁명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청나라와 같은 외세가 없이 우리 스스로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적인 개혁을 했더라면 또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내부적으로 무능한 왕들과 사치와 권력 유지에 급급한 귀족들과 구체제의 모순을 제거한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도 전환점이 된 대사건인 1789년 프랑스혁명은 우리나라의 동학농민혁명과 유사한 성격을 띠었지만 프랑스의 모든 것을 바꾼 역사의 큰 소용돌이였다. 우리의 동학농민혁명도 프랑스대혁명과 같은 역사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었지만 외세(청나라와 일본)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서양에서는 대변혁의 시대가 끝나면서 'The great game'이라는 식민지 쟁탈시대가 진해되었다.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1813~1907)은 1813년부터 1907년까지 94년간 이어진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의 전략적 경쟁이다.
< 불평등 개항 위협(威脅)을 기회(機會)로 20년간 개혁을 한 일본은... >
1592년의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은 한국보다 강대국이었을까? 군사적으로는 서양의 무기를 받아들여 강대국이었다 할지라도 사회전체로는 아직 한국이 더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일본이 결정적으로 근대화가 된 것은 메이지 유신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처음으로 개방의 단초를 제공한 사건은 1853년 미국 페리제독이 일본을 압박한 시기였고 13년 지난 조선은 1866년 미국의 재너널 셔먼호 사건과 병인양요가 있었다. 일본도 미국에 똑같은 불평등 조약으로 강제로 불평등 개방을 당했지만 위기를 기회로 삼아 메이지유신이라는 개혁개방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일본이 강대국으로 도약하는 계기는 일본 메이지 국왕의 개혁적인 사고였다.
일본이 외부 세력의 압박을 받던 1853년,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일본의 해안에 등장하여 막부 정부에 개항을 요구하면서 일본은 국제 사회의 변화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일본의 도쿠가와막부는 쇄국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결국 일본은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며 외부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게 된다. 일본정부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포함된 ‘이와쿠라 사절단’을 조성하여 국가예산의 1%라는 엄청난 돈을 쏟아부으며 약 1년 동안 미, 영, 프, 벨 등 선진국 12개 나라를 방문하여 철도와 조선소, 군사제도, 교육제도를 배워온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 역사에서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한 중대한 변환점으로,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어 약 20년간 진행되었다. 이 시기는 일본이 전통적인 봉건 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수립하며 급속하게 근대화를 이뤄낸 과정으로, 특히 메이지 천황의 즉위와 함께 본격화되었다. 일본은 이 혁신적 개혁을 통해 서구 열강과 대등한 입장에서 국제 사회에 발돋움했다.
P.S.: 사진설명_ 담양 추월산의 보리암이 보이는 절벽, 눈 내린 초 겨울 추월산에 다녀왔는데 절벽에서 바라본 보리암은 비구스님의 불경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져 잊을 수 없는 멋진 풍경을 제공하였다.
보리암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에 의병 3,000명을 이끌고 온 김덕룡 장군의 묘비와 왜군에게 쫓겨 순절한 김덕룡 장군의 부인 흥영 이 씨의 묘가 함께 있는 곳으로 신성한 장소였다. 다시 한번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先祖)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