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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징과맥락 Jul 23. 2022

여름에 어울리는 시집 추천

민구 - 당신이 오려면 여름이 필요해

 

시집 - '당신이 오려면 여름이 필요해'



민구 시인의 시집 『당신이 오려면 여름이 필요해』는

그 안에 수록된 시 『여름』과 함께

내가 과연 여름을 잘 보내고 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들었다.


내년의 나는 올해의 여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전에, 나의 작년의 여름은 어떠한 여름이었을까? 사실,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 후

약 30초 동안은 정말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1분 정도를 생각한 결과,

작년 여름에 나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던 기억이 났고,

2분이 더 흘러 3분째에

수학 과외를 하고 있었던 기억까지 떠올랐다.

안간힘을 써 조금 더 생각을 해보니

당시 심리상담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이상의 기억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2022년의 여름을 살고 있는

현재의 나에게 2021년의 여름은

“내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와 수학 과외를 하고

심리 상담을 공부했던 시간”이라는 언어로 정리된다.


어찌 보면 그 안에 내가 느꼈던 모든 감각과

하루하루의 감정,

그리고 내 주변에 벌어졌던 사소한 일들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정리하면,

그 양이 무한에 수렴할 수 있을 법한

“3개월”이라는 시간의 뭉텅이가

2022년 현재의 나에게는

“내가 카페 아르바이트와 수학 과외를 하며 심리 상담을 공부했던 시간”

이라는 언어로 남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작년 여름은?

3년 전, 4년 전 여름은?

나는 재작년 여름에 대한 기억조차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 한참을 생각을 하거나

당시의 찍은 사진들을 보면

몇 가지의 기억이 떠올라

그 기억의 단편들을 언어로 엮어

당시의 과거를 건져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5년 전, 6년 전은?

정말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마찬가지로

당시의 사진을 보거나 이야기를 듣는다면

다시 기억이 날 것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기억이 나지 않다가

사진이나 이야기를 들으면

왜 감쪽같이 기억이 되살아나는 걸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언어체계에 포함되는 것들만

표상으로서 인식할 수 있다.


러나, 반대로 우리는

언어체계에 포함될 수 없는 것들은

금방 망각 해버 리거나

의식하지 않고 그냥 흘려보낸다.


이런 관점에서, 

언어 체계가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살았던 원시인들에게 세계는

혼란 덩어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번개가 친다’라고

인식하는 자연 현상조차 원시인들에게는

함부로 정의할 수 없는 미스터리한 현상이었을 것이다.


원시인들에게는

‘번개가 친다’는 현상을 포용할 수 있는

언어 체계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개중 똑똑한 한 사람이

“그것은 신의 분노이다.”와 같은 언어로 정의 내린다면,

그 집단은 잠시 세계에 대한 불확정성을 잠재우고

혼란을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세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과 대상을

정의할 수 있는 언어 체계가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은 세계에 대한 불확정성을 줄이며

혼란스러운 것들을 ‘인식의 테이블’ 위로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시인과 달리 현대인들은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언어체계가 충분하다 못해

고도로 발달된 언어체계 속에서 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하루라도 “흘려보내기”을

좀처럼 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1학년 때는 무엇을 해야 하고,

방학에는 자격증을,

2학년 때는 대외활동을,

취업 후에는 부업,

혹은 이직을 위한 또 다른 무언가 등등을

하지 않으면 좀처럼 편하지가 않다.


유튜브에서는 매일 같이

컴퓨터 코딩을 배워

비전공자가 개발자가 될 수 있다는 광고,

부업을 해서 수천만 원을 벌어

경제적 자유를 누리라는 광고,

인플루언서가 되라는 광고 등

잠시라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나만의 시간을 불확정적인 상태로 두지 못하고

“무언가를 해야 하는 나”로 확정하게끔 부추긴다.




벌써 2022년 7월의 끝을 향해하고 있는 현재,

여름이 반이 조금 지난 현재 시점.


나는 어떠한 여름을 보냈을까?

방학 전 6월 말까지는 학교 공부를 하였고

그 후에는 잠깐 여행을 다녔다가

그 후에는 자격증, 취업 준비 등을 하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고 있으면서도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조금의 확신도 갖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오늘은 무얼 해야 하지? 내일은?

이번 주에는 무엇 무엇을 해야 맞는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을 하게 된다.


그날 그날의 하루, 혹은 시간,

심지어 분 단위로 어떠한 것을 해야 한다고

정의를 내려야 하는 상황을 마주한 현대인에게

민구 시인은 일종의 ‘빈 틈’을 제시한다.



여름 – 민구

여름을 그리려면 종이가 필요해

종이는 물에 녹지 않아야 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크거나
훨씬 작을 수 있다

너무 큰 해변은 완성되지 않는다
너무 아름다운 해변은 액자에 걸면 가져가 버린다

당신이 조금 느리고
천천히 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 남은 검은색 파스텔로
아무도 오지 않는 바다를 그리자

당신의 여름이 기분이거나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여행지라면
시원한 문장을 골라서 글로 쓸 수 있는데

여름이 오려면 당신이 필요하다
모두가 숙소로 돌아간 뒤에
당신이 나를 기다린다면 좋겠다

파도가 치고 있다
누군가는 고래를 보았다며 사진을 찍거나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겠지만

고래는 너무 커서 밑그림을 그릴 수 없고
모래는 너무 작아서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다

바다가 보이는 방에서 두 사람을 기다린다
그들이 오면 여름은 지나가고
방문을 열면 해변이 사라져서
나는 아무것도 못 그리겠지

그래도 당신과
오리발을 신고 있겠지



우리는 세계와 대상,

그리고 우리의 삶을 체계 안으로 포섭하여

정의 내리고

규정해야 할 필요도 있지만,

가끔은 규정의 잣대나 틀이 아닌

불확정한 상태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도 있다.


『여름』에서 또한

대상을 규정하려는 주체와

규정의 도구,

그리고 이를 거부하는 태도의 화자를 볼 수 있다.



1연의 “여름을 그리려면 종이가 필요해”에서

‘종이’는 여름이라는 대상을 기록할 도구이다.


여름은 화자가 마주하고 있는 세계의 일부이고

‘종이’는 화자가 마주한 세계의 일부를

언어 체계 안으로 포섭하는 데에

사용되는 도구인 것이다.


하지만, 2연과 3연을 통해

세계를 완벽히 담을 수 있는 틀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이는 물에 녹지 않아야 하고”에서

화자는 완벽한 분석 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화자의 관점을 볼 수 있다.

물에 녹지 않는 종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상하는 것보다 크거나 훨씬 작을 수도 있다”에서

아무리 완벽한 틀이라고 생각되는 틀로

세상을 바라보려 하여도

세계는 인간의 예상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너무 큰 해변은 완성이 되지 않는다

너무 아름다운 해변은 액자에 걸면

가져가 버린다”는

바다를 크게 그린다고

(크기라는 척도로 대상을 묘사하려 해도),

아무리 아름답게 그려도

(미라는 척도로 대상을 묘사하려 해도)

바다라는 대상을 완벽히 담을 수도 없다는 의미이다.

세계와 대상에 대한 완벽한 틀과

체계는 없다는 한계를 지적한다.



『여름』의 화자는

대상을 틀과 체계를 통해 규정하는 태도 대신

세계의 불확정성을 나와 함께 느껴줄

‘너’를 찾고자 한다.


화자가 찾는 너는

사랑하는 연인이 될 수도 있고

친한 친구 혹은

사랑하는 가족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7연, 8연, 9연, 10연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7연과 8연에서 파도 앞에서 사진을 찍거나

만년필을 꺼내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사진과 만년필 또한 1연과 2연에서 언급된

종이와 같다.


세상의 불확정성을 틀과 체계로 포섭하려는 사람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화자는

“고래는 너무 커서 밑그림을 그릴 수 없고

모래는 너무 작아서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다”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시 [여름]의 상징 구도


화자가 기다리는 것은

세상을 규정하는 틀과 체계가 아니다.

9연과 10연에서 드러난 것과 같이

화자는 세상의 불확정성을 있는 그대로

자신과 함께 느끼고 감내할

‘사람’을 기다린다.


9연과 10연에서 화자가 기다리는

‘두 사람’과 ‘당신’은 이를 의미한다.

화자는 종이와 사진, 만년필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려는 것이 아닌

자신과 함께 여름을 보낼 '너'가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작가는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행복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현대인이 살면서 놓쳐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하다.

이제 2022년 7월의 마지막이 다가온다.

남은 한 달의 여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시집을 한 번 더 읽어 봐야겠다. 

비슷한 고민을 갖고 계신 분들께도 이 시집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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