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가장 사랑하는 곳이 있습니다. 산책로입니다. 저는 2단지에 살고 있고 옆에 1단지가 있는데 사이에 도로가 없습니다. 산책로가 깔려 있습니다. 2단지 뒤 쪽으로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있고 그 옆에는 고급 주택 단지가 들어서 있는데 역시 산책로로 다 이어져 있습니다.
더 좋은 산책로가 정비된 신축 아파트들도 물론 있겠지만, 제가 가본 곳 중에는 단연코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넓고 깨끗한 데다 온통 평지라서 걷기에 너무 좋습니다. 게다가 탄천으로 연결되는 지하도까지 있어서 걸어서 쉽게 천변으로 갈 수 있습니다.
비록 집은 낡고 비좁지만 산책로가 너무 좋아서 집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스트레스가 모두 사라지는 기분이 듭니다. 특히, 날씨 좋은 가을철에는 예쁜 색 옷을 입은 높고 큰 나무들이 늘어선, 끝도 안 보이는 산책로를 보면 마음에 잔잔한 평화가 찾아옵니다.
사람들을 집에 초대하는 것은 좀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나의 비장의 무기 산책로가 있으니 든든합니다. 차 한 잔씩 손에 들고 산책로로 들어서는 순간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굳이 내 입으로 자랑하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팝콘처럼 터져 나옵니다.
우리 마을의 자랑이자 나의 최애 공간인 산책로는 당연히 땅콩이에게도 훌륭한 산책로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걷고 뛰는 여러 사람들과 다양한 이웃 반려견들을 경험할 수 있는, 조금 늦었지만 풍성한 사회화의 장이 되리라 부푼 기대감을 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땅콩이를 데리고 산책로를 거닐다 보니, 새로운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평소에는 잘 보지 않던 바닥을 땅콩이 덕에 조금 더 자세히 보게 됩니다. 무심코 지나치던 높고 낮은 담벼락들을 조금 더 가까이서 바라보게 됩니다.
바닥에 거무튀튀한 둥그스런 자국들이 눈에 띕니다. 그리고 그것보다는 조금 작은데, 주위의 색감과는 조금 이질적인 밝은 황토색의 흔적들이 시선을 끕니다. 또한, 밝은 주황색의 작은 알갱이들이 들어있는 조그마한 물질이 보도블록 사이에서 보이기도 합니다.
조금 이상한 것도 있습니다. 화창하고 건조한 날씨인데 젖어서 색깔이 진해진 돌담의 벽돌들이 있습니다. 산책로 중간중간에 놓인 가로수를 떠받드는 아랫 기둥은 에센스를 발랐는지 늘 촉촉합니다. 그리고 부지런한 식집사들이 수고하는 가로수들에게 음료를 배달하고 갔는지 나무 밑동 부분에 물이 흥건합니다.
땅콩이는 그런 이상한 것들에 굉장히 관심이 많습니다. 누가 그런 별난 짓을 하고 갔는지 철저하게 조사를 합니다. 넓은 산책로를 신나게 뛰어가도 모자랄 판에 시간을 꼭 내어 코 돋보기를 이용해 점검을 합니다. 일 하느라 산책할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게다가 땅콩이도 한몫을 반드시 하고 집에 들어갑니다. 증거를 지우려고 해도 완전범죄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후에 그곳을 지나가는 누군가가 땅콩이가 벌이고 간 짓을 또 조사할 것입니다. 땅콩이가 했듯이 말입니다.
이제 보니 산책로는 "나의 자랑스러운 산책로"로 제한된 그렇게 좁은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털 복숭이들의 근심과 스트레스를 풀 수 있고, 자기의 그림을 제 멋대로 남겨놓을 수 있는 거대한 스케치북이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자기를 찾아보라고 은근히 숨겨놓은 재미난 보물찾기 놀이터였습니다.
땅콩이 덕분에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산책로가 보입니다. 안 그래도 소중한 이 공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곳을 더 많이 아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에게 필요하고 귀한 공간이니 더 잘 사용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신을 신지 않고도 걷고 싶은 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얀색 스케치북이었으면 좋겠고, 정돈된 놀이터였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처럼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지 않으렵니다. 산책을 갈 때는 주머니에 물티슈와 작은 물통이라도 하나씩 더 넣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