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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희 Jul 24. 2024

판포리로 가는 길 - 취업

  

  졸업 후 첫 관문은 취업이었다. 취업소식은  집집마다 너 나 할 것 없이 경사스러운 일이었으며 대학을 졸업했음에도 아직 소식이 없는 친구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특히 시골에서 서울의 대학병원 시험에 통과한 친구들은 대기 기간이 있음에도 서울로 갈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이제 부모님의 그늘을 벗어나 일하고 수고한 노동의 대가를  손에 쥐어 살아가야 하는데 서울이건 어디건 집을 떠나서야 타향살이가 서럽고 모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0년대 초반은 우리나라가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많은 젊은이들이 최루탄과 맞서 눈물 콧물 흘리며 전쟁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간간이 들려오기는 해도 정보가 거의 두절된 제주에서 자세한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어른들은 오보로 도배된 신문을 읽으며 "젊은이들이 공부는 안 하고 폭도 같은 행동으로 나라를 어지럽히면 되겠나"라고 하며 신문을 들고 그들을 탓할 뿐이었다. 다른 학교의 친구 소식을 들을 때면 누구는 어디로 가서 행불이 되고 누구는 어떤 일에 연루되어 졸업을 못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바람결에 들려와도 우리 발등의 불을 끄는 일이 더 중요하여 뜻을 둔 젊은이들의 행렬에 동참하지 못했다. 

  여하튼 나는 교수님의 추천서를 받고 성모병원을 찾아갈 수 있도록 적어준 메모장을 손에 쥐었고 그래도 육지인 병원에 취업하여 부모님의 자랑이 되었다. 집에 반항하여 나가는 가출이 아니라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독립을 위해  대문을 열고 자랑스럽게 집을 떠나게 된 것이다. 

  집에서 나와 공항 가는 버스를 타고 제주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김해공항에서 착륙 후에  버스를 타고 기차역으로 가서 무궁화호를 타고 대전역에 내린 후 버스를 타고 옥천에 내렸다. 마을은 크지 않아도 사거리로 트여 있어 이 마을의 중심가임을 느끼게 했다. 가게 이름이며 내가 자란 곳인 서귀포 시내와 느낌이 다를 바 없어 생소하지는 않았다. 그저 동서남북 방향을 잘 모를 뿐이었다. 서있는 맞은편에 '탐라 다방'이라고 달린 간판을 보니 여기서도 '탐라'라고 부를 수 있구나 생각하며 웃었다. 특별할 것 없이 앞으로 내가 몸담고 지내야 할 나의 직장이 있는 동네였다. 지나가는 행인에게 성모병원이 어디냐고 물어보았다. 가르쳐 주는 곳을 쳐다보니 멀리 옥천성모병원이라고 세로로 쓰여있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성모병원까지 걸어가는 길은 경사가 있어 따뜻한 겨울 날씨가  가방을 들고 가는 내내 겨울 외투가 무거워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병원 입구에 다다르자 가쁜 숨을 고르게 하느라 한숨을 쉬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금세 땀을 마르게 하더니 한기를 느끼게 했다. 병원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형 병원은 아니었지만 병원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아담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겨울이라  나무들은 갈색의 크고 작은 가지들이 길게 길게 위로 뻗어 있었고 사람들이 감히 올라갈 수 없는 가지 사이에 새가 둥지를 튼 모습이 신기하게 보였다. 병원 건물 맞은편 위쪽에 옷을 벗은 나무들 사이에로 성모마리아 상이 서있고 동시에 또 그 위로 예쁜 건물의 성당이 있었다. 성당의 건물은 성모마리아 상과 함께 병원을 내려다보는 모습이었다.

  초행길을 용감하게 낯설고 물 설은 이곳에 물어물어 잘 찾아왔다. 병동을 찾아 책임 간호사에게 새로 입사한 간호사라고 인사를 했더니 간호과장 수녀님과 통화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오늘은 주말이니 기숙사 사감 수녀님의 안내를 받고 방을 배정받은 후 월요일에 병동으로 와서 인사를 하자고 했다. 안내를 해준 간호사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기숙사로 향했다.

  

  사감 수녀님은 방은 맨 끄트머리에 있는 방을 배정해 주셨다.  양쪽에 일인 침대 하나와 반쪽짜리 캐비닛을 하나씩 사용하게 되어있었고 끝에 있는 방이라 보일러도 잘 들어오지 않아 춥다고 했다. 사감 수녀님은 방이 비는 대로 옮겨줄 수 있다고 하며 힘들더라도 지내고 있으라고 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니었거니와 선배 언니가 두고 간 이부자리를 사용하기로 하고 먼 길을 떠나온 내게 이 한 몸 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좁은 침대에 피곤한 몸을 내던지듯 쓰러져 타인의 향취를 느끼며 깊은 잠에 떨어졌다.

  잠결에 복도를 왔다 갔다 하는 발소리와 두런거리는 소리를 누운 채로 듣고 있다가 잠이 완전히 깼다. 고개만 두리번거리다가 옆의 벽이며 천장의 분위기가 "집이 아니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에 깜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네." 하고 대답했다. 빼꼼하게 문을 열며 "괜찮으면 휴게실에서 인사를 나누자고요."라고 하면서 웃는 얼굴을 드러냈다. 

  넓어 보이는 휴게실에는 몇 사람이 과자봉지를 풀어놓고 안방에 있는 가족처럼 편안한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서로 모르는 얼굴이니 인사부터 하고 지내자며 각자 이름을 비롯하여 본인 소개가 시작되었다. 그중에 한 명이 나와 같은 신입이라고 밝혀 우린 서로 동기라는 또 다른 호칭으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동기의 이름은 '영숙'이라고 인사를 했으며 순박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고향이 영동이라고 밝혔다. 동료가 된 한 선배가 기숙사를 이용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일러주며 이층은 수녀님들 숙소라고 알려주었다. 더불어 가끔 수녀님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얘기도 함께였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다며 지하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가 주방 식구들에게 인사를 시키고 저녁밥을 받게 했다. 지하의 식당은 식구가 많은 집에 있음 직한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어 이곳을 이용하는 직원이 많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처음 보는 모든 것이 낯설기는 했으나 맘에 들었다. 이것은 좋고 저것은 별로고 요것은 아니라는 분별이 없이 누구의 간섭과 잔소리를 안 들어도 되었고, 내가 일하고 돈을 벌 수 있어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또한 마음을 설레게 했다. 비록 낡고 오래된 메트로 인해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는 병원용 침대이긴 했으나 나 혼자 맘 놓고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네모진 방을 둘러보며 익숙하게 살아왔던 그늘 밖으로 나와  어른의 몫을 하며 겪게 될 시간들이 어떻게 풀려나갈지 궁금하기도 하고 스며드는 두려움을 다독거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적당히 아둔하여 눈치도 없고 영악스럽지도 않아서, 힘들고 어려운 일에 힘들다 여길 줄 모르고 어려운 일에 어렵다 불평할 줄 모르며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에 잘 참아낼 수 있다. 아직은 춥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지금 지내야 하는 이 방도 보일러가 없이도 따뜻한 기운이 돌 것이므로  조금만 참으면 된다.

  내일은 휴게실에서 인사를 나누었던 영숙이와 함께 병동 출근을 같이 하기로 했다. 새로운 날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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