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희 Jul 17. 2024

 판포리로 가는 길 - 2부 졸업


  학교에는 졸업식을 앞두고 있어 시끌벅적했다. 넓지 않은 교정에는 졸업을 축하해 주기 위해 참여한 부모형제 혹은 다른 학교 친구들이나 선배 후배들이 꽃다발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미리 이름있는 꽃집에서 준비해 오거나 미처 준비되지 못한 경우는 아마도 들어오는 정문 입구에서 샀을지도 모른다. 졸업식 시즌이 대목인 꽃집은 밤새 만든 꽃다발을 리어카와 바구니에 잔뜩 싣고 와서 가격을 부르며 호객하는 모습이 이상스럽지 않았다. 꽃집은 이날뿐 아니라 행여 빠뜨리지 않도록 수첩에 적힌 날짜대로 학교마다 쫓아다닐 것이다.

  지정된 강의실에 들어서니 졸업식 참석을 위해 준비된 가운과 캡을 받을 수 있었다. 친구들은 아무 말이든 떠들어대며 들뜬 기분을 표현했다. 시끌벅적한 소음 속에 어떤 친구는 이미 취업되어 자랑스러워했고 어떤 친구는 학교생활이 많이 고단했으니 잠시 쉬겠다는 친구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졸업식에 참석하는 것은 삼 년 동안 고등학교 같은 스케줄을 맞추고 국가고시 시험에 통과했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것이었다. 

  시험에 누락된 친구들은 당연히 참석할 수가 없었고 궁금하긴 했지만 서로 함구했다.  더구나 어찌 된 일인지 올해는 전국적으로 간호대학의 국가고시 시험에 통과 못한 학생들이 평년보다 많아서 학교마다 초상집이라는 소문이 들렸다. 학교 근처에 살고 있던 외삼촌 내외분이 축하해 주러 와서 나의 합격 소식을 학생과에 미리 알아봤다는 얘기를 하면서 같이 기뻐해 주셨다. 다정다감한 외숙모는 외모도 세련되고 미인이셨는데 내가 취업차 육지로 떠난 후로 오랜 세월 뵙지를 못했다.  


  졸업식 복장은 하얀 원피스 가운을 입고 붉은 자줏빛의 허리까지 오도록 되어있는 망토를 걸치도록 되어 있었으며 머리에 쓰는 하얀 캡에는 가운데 가로줄의 검은색의 줄 하나가 그어져 있었다. 이 줄 하나를 긋기 위해 삼 년 동안 공부하고 병원 실습의 학사과정을 마치느라 여유롭고 멋있는 캠퍼스 생활을 누려보지 못했지만 취득한 면허증 하나로 보상받았다. 졸업을 축하해 주러 찾아온 부모님이나 친척들에게 졸업식 복장을 갖춰 입은 모습은 조금은 특별하고 예뻐 보이게 했다.   

  간호대학에 입학하고 신입생 때는 가관식이라고 해서 나이팅게일 선서식을 했다. 나름 축제 같은 분위기의 큰 행사에 속했는데 그때 머리에 썼던 캡에는 줄이 없는 하얀색이었다. 그때도 선 후배나 주변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축하해 주기 위해 꽃다발이며 선물들을 들고 왔었다. 연합서클 활동을 같이 하던 동료들이 찾아와 같이 축하해 줬었는데, 학교 옆에서 같이 자취를 했던 애숙이와 자취방에서 밥을 해 먹이고 보냈었다. 

  졸업식은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 얼굴이지만 극히 짧은 인사만을 나눌 뿐이었다. 좁은 강당 안에 졸업생보다 축하객이 더 많았고 모여든 사람들의 잡담으로 인해 식의 진행이 엄숙해 보이지는 않았다. 졸업식을 마친 후 가운을 반납하기 위해 별도의 강의실에 모였던  친구들은 삼삼오오 계획된 곳으로 흩어지고, 정선이와 현옥회와도 긴 시간을 갖지 못하고 아쉬운 채로 헤어졌다. 

  국가고시 날짜가 임박해지자 걱정이 된 셋은 한 달 남짓 현옥희 자취방에서 합숙하며 공부했다. 배고픈 사람이 밥하기로 하고 시작했는데 내가 밥을 자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가끔 각자 집에서 싸온 시골 반찬들을 펼쳐놓고 먹어가며 공부했던 기억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두 친구와 보낸 짧은 시간은 평생 자매 같은 정을 느끼게 했다.

  삼 년을 보낸 학교는 단과대학이라 캠퍼스라고 불릴 수도 없는 건물 하나 있는 조그만 학교였다. 그래도 이곳에서 80학번이라는 호칭을 얻어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었고, 가관식 행사를 했고 페스티벌을 열어 축제를 벌였으며 서클 활동을 했다. 이 조그만 학교에서 앞으로 먹고 살아갈 간호원 면허증(당시에는 간호원이라 불렸음)을 손에 쥐여주며 사회로 나가보라 한다. 후에 이 학교는 다른 학교로 편입되었다.  

  나는 학생과 과장님의 추천으로 옥천성모병원 취업했다. 오리엔테이션 기간이었는데 같이 있던 선배들이 한 번뿐인 졸업식에는 가는 게 좋을 거라고 해서 이 시간을 위해 기차 타고 비행기 타고 해서 온 것이다. 반가워하실 줄 알았던 부모님은 집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데 돈 쓰면서 왔다고 야단했고 졸업식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다음날 들고 온 가방을 그대로 들고  내가 속한 직장의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서러운 마음은 양쪽 뺨에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인해 뜨거웠다. 돌아갈 데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안도의 마음을 그때 처음 느꼈다. 그러나 그날 흐르던 눈물은 고향에 올 때마다, 앞으로 살면서 쏟아내야 할 아프고 슬픈 일들의 시작임을 알지 못했다.





이전 02화 판포리로 가는 길 - 한경면 판포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