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어머니는 우리에게 "밥 먹어라"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하루 중 같이 있는 시간이면 아마도 십 분마다 하셨다. 던 것으로 여겨진다. 처음 몇 번은 "지금 안 먹어요."라고 대답을 하다가 나중에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금방 안 먹는다고 했는데도 그러거나 말거나 또 "밥 먹어라."라고 하셨다.
친정어머니의 목표는 오직 우리에게 밥을 먹여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사시는가 보다 생각한 적도 있었다. 연세가 많아지면서 허리가 구부러졌어도 자식들이 찾아오면 밥 하려고 일어서는 걸 내가 화내면서 말릴 때도 있었다. 이제 자식이 차려주는 밥상을 받아야 할 때니 가만히 앉아 계시라고 하고는 내가 재빨리 준비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어느 틈에 싱크대 앞으로 가 계셨다.
"내 살림은 내가 임의로우니 내가 하는 게 좋다"라고 하실 때도 있었고 더 구부러지고 편찮으실 때는 "이렇게라도 해야 운동이 된다"라고 하셨다. 싱크대를 붙들고 허리를 기대고 서있을 때까지도 어머니는 이곳이 당신 영역이라는 표현을 암암리에 보여주셨고 자리보전하여 누워 계실 때는 힘없이 쳐다보며 냉장고에 이것저것 꺼내서 밥 먹으라고 하셨다. 결국에는 밥 얘기가 나오면 나도 웃음이 나왔다.
"전생에 밥하고 원수라도 졌지"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나도 밥을 참 열심히 하며 살았다. 애 셋을 낳고 키우는 동안 거의 빠지지 않고 하루에 밥상을 세 번 차리고 그 외 간식을 차려냈다. 여북하면 쌀을 주문하는 내게 슈퍼 아저씨가 웃으면서 우리 집은 쌀을 참 자주 부른다고 했을까. 나도 어쩌면 밥에 원수라도 졌을지 모를 일이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장군 같은 홀시어머니 밑에서 시집살이를 혹독하게 겪고 살았다. 장남으로 효자인 아버지는 할머니께 말대꾸를 하는 법이 없었고 시동생 둘 시누 둘을 장가보내고 시집보내며 퍽퍽하고 고단한 시집살이에 어머니는 늘 한숨을 쉬며 살았다.
나도 결혼을 하고 애 셋을 두었다. 끼니때마다 수시로 가족들의 밥상을 차려내며 닮고 싶지 않던 친정어머니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한숨이 자주 쉬어졌다. 더구나 조금씩 자라기 시작하는 애들은 "엄마는 외할머니 같아."라고 하며 양념처럼 더해졌다.
어느 해 친정어머니의 생신이 다가왔다. 내가 맏이면서 먼 육지로 시집와 멀리 살고 있으면서 애들이 어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핑계로 어머니의 생신을 제대로 챙겨드린 적이 없었음을 기억했다. 어떡하든 편치 않았던 마음을 회복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와닿았다. 장을 봐오고 준비를 마친 후에 애들이 자는 시간을 틈타 새벽에 전도 부치고 돼지갈비도 하고 잡채와 나물 무침도 만들었다. 미역국은 쇠고기를 볶아놓고 마른미역 한 묶음 넣고 박스 포장하여 준비했다.
출근하려고 눈을 뜬 남편이 안방에서 걸어 나오며 이 꼭두새벽에 기름냄새가 진동하고 무슨 난리가 났냐고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쑥대밭이 된 주방을 둘러보았다. 남편에게 출근 준비를 위해 아침상을 차려주면서 엄마 생신 상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남편은 잘해서 보내드리라고 하면서 출근 시간이라 바쁘게 나갔다. 당일 택배가 없던 시절이었다. 오전에 공항으로 가서 항공 화물로 보내면 제주도에 있는 가족이 공항으로 찾으러 와야 했다.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제주에 계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공항에 가서 꼭 오늘 찾아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저녁에 엄마에게서 온 전화를 받는데 얼굴을 보지 않아도 저 멀리 엄마의 흥분되고 기분 좋은 목소리가 전해졌다.
"너는 애 데리고 어떻게 이런 걸 다 준비할 수 있었니? 덕분에 이웃에게도 나눠주고 식구들이 맛있게들 먹었다. 고맙다."
나도 나이가 들었다. 친정어머니가 암 판정을 받게 되면서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어머니를 뵙기 위해 제주에 왔다. 애들도 성인이 되어서 붙들릴 일이 없었기에 오래전에 사두었던 땅에 조그맣게 집을 지어 내 공간을 만들고 짬 나는 대로 엄마를 찾아뵈었다. 갈 때마다 음식을 만들고 가서 조금이라도 드시는 걸 보고 돌아오곤 했다. 참, 나도 밥에 진심이었다.
시간을 얼마 안 남기고 이제 아무것도 입에 넣지 말라고 하셨지만, 드셔야 통증도 덜 하실 거라 하고 죽을 쑤어 입에 넣어드렸다. 그런 내게 "그래도 쌀알이 들어가니 눈이 뜨인다."라고 하시며 쳐다보시고 웃으셨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날 생각하고 있는 거 나 안다." 나는 울컥했다. 아마도 이 말씀이 내 평생에 나를 위로하게 될 것이었다.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챙겨야 할 모든 것이 정리되면서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살아계신 동안 웃을 일 만들어드리고 싶었다. 제주에 땅을 사서 집을 지어 자랑거리를 만들어 드렸고, 늦었지만 대학원을 졸업해 졸업 논문을 안겨드렸다. 누워계실 때는 손발톱을 깎아드렸다. 평생 쉬지 않고 궂은일을 하면서 손발에 굳은살 박이고 살이 터져 피가 흐르기도 하고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았었는데 눈 감을 때 돼서야 그 손과 발이 부드러워지셨다.
가신 어머니는 내 옆에 계시지 않고 내게 "밥 먹어라."라고 했던 목소리도 들을 수 없다. 어머니를 닮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애들은 "엄마는 외할머니랑 똑같다"라고 한다. 아마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밥 먹어라."라고 밥 얘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나간 시간이 어떻게 후회가 없을 수 있겠는가 마는 그래도 내게 "네가 날 생각하고 있는 거 나도 안다."라고 했던 엄마의 말씀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울고 웃을 일에 내 어깨를 만지는 손길을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