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참깨

by 옥희


아침 산책길에 도로 한쪽 편에 참깨단이 열을 만들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거둬들인 참깨는 아직 푸르러 햇살을 받기 위해 가지런한 모양을 만들어 눕거나 세워져있었다. 알이 여물도록 땅에서 자랐으니 이제 햇빛에 의해 바짝 말려야 한다. 볕이 잘 드는 곳에서 진한 갈색을 띠며 만지면 바삭거리는 소리를 낼 정도로 말린 참깨는 벌어진 씨앗 주머니를 통해 참깨를 털어내야 한다. 참깨는 한 알이라도 소중히 다뤄야 하고 한 움큼을 만들기 위해서는 몇 단을 털어내야 한다.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 집을 짓기 전 맨땅에 참깨 씨앗을 뿌려 그해 수확을 거두었다. 퍽퍽한 땅에 제대로 지은 농사가 아니어서 참깨는 부실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한 알이라도 허투루 날아가지 않도록 참깨 알을 애지중지 모아 주변에 인심도 쓰고 내게도 봉지 봉지 챙겨주셨다. 평소 참깨를 잘 먹지 않던 내가 우리 땅에서 농사지은 것이라고 하여 그때부터 음식에 참깨를 뿌려 먹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월급쟁이 그만두고 사업을 하겠다고 할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마음 편히 지내본 적이 없었다. 날마다 빚에 시달리고 어머니와 큰소리 내는 일이 많아졌다.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집과 과수원이 날아가고 허구한 날 빚쟁이가 집으로 찾아들었다. 빚쟁이는 내 직장까지 찾아와서 결판내자고 하고 일하고 있는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작은 동네에 우리 집은 집안이 망했다고 이웃들은 쑤군거렸다. 친정어머니는 날마다 세상이 끝날 것처럼 울고불고했지만 그래도 세상은 여전했고 아버지보다 이십 년 가까이 더 사셨다.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은 누구나 겪는 일이며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라고 한 속담이 내게도 와닿게 되었다. 손에 지푸라기도 잡을 것이 없을 때 이담에 50평짜리 집을 짓겠다고 혼자 얘기하는 것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어머니의 얼굴이 생각난다. 어찌어찌하여 땅이라고 불리는 곳을 매입하여 집을 지었다. 50평 건물을 지었고 창고도 지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옆에 계셨다면 "참 애썼다"라고 하셨을 것이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애들도 다 자라 성인이 되었고 그때 힘들어했던 아버지의 나이가 되고 보니 아버지가 많이 생각난다. 가장이 되어 가솔들을 데리고 앞으로 살아갈 막막한 날을 생각하며 무서움과 두려움에 떨어 아무도 모르게 베개를 많이 적셨을 것이었다.


친정어머니가 털어낸 참깨는 먹다가 먹다가 아직도 냉동실 한 귀퉁이에 남아 가끔 볶아서 음식을 만들 때마다 과하게 뿌려 먹는다.

참깨를 걷어낸 땅은 다음 심을 작물을 위해 밭을 정리해 놓았다. 농부들은 또 다음에 심을 작물을 생각한다. 아무것도 심어있지 않아 보여도 동네를 따라 산책길을 걸을 때면 심어놓은 모종이 푸른색을 띠며 소리 없이 자라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그때 알았더라면 마음을 추스를 여유를 가져 세상 끝날 것 같은 절망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메마르고 퍽퍽해 보이는 땅에서도 푸르름을 볼 수가 있다. 보이지는 않으나 심연에 깨알 같은 씨앗을 품어 푸르름으로 덮일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면 오늘의 슬픔과 아픔을 이겨낼 수가 있겠다.





작가의 이전글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