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아버지가 심장수술을 하게 돼서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계셨다. 친정어머니가 옆에서 간호를 하고 있었다. 애들이 아직 어리고 지방에 있어 자주 뵙지를 못했다. 첫째 여동생이 마침 서울에 살고 있고, 제부가 근무하는 병원에 입원 중이라 부모님께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마음뿐이었다. 맏이라고 하나 맏이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나를 자책만 하고 있었다. 아무튼 병원에서 수술은 잘 됐다고 했고 추후관리는 집에서 하는 것으로 했다. 아버지는 제주로 돌아가셨다.
건장했던 아버지는 많이 쇠약해지셨다. 사업 실패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와 세월이 주는 무게가 아버지를 더욱 사그라지게 하였다. 우리가 지금만 같았어도 혹시나 경제적인 도움이 되기 위해 애써봤을 터였다. 가족이라고 하면서도 얘기를 할 줄 모르고 살아온 탓에 속을 보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외롭고 무서움에 혼자 울었을 것이었지만 아무도 손을 내미는 사람이 없었다.
설이 되어 시댁을 찾았다. 가족들은 내게 여전히 냉 냉했다. 남편에게는 웃음 지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지만 내게는 넌 우리 식구가 아니라는 선을 확실하게 긋고 있었다. 주방에서 몇 개의 그릇을 씻고 손의 물기를 닦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어머니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냉장고의 냉동실 문을 열더니 꽁꽁 얼어붙은 주먹만 한 덩어리를 나를 향해 식탁에 떨어뜨렸다.
"전화해라"
냉동실에서 꺼낸 덩어리를 보니 새끼 조기를 얼려놓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전화도 하지 않는 며느리를 괘씸하기도 하지만 전처럼 풀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저 그대로 식구들이 모여 나를 반찬 삼아 씹을 뿐이었다. 나 역시도 이 집 시구들에게 차갑게 둘러쳐진 냉기가 점점 얼음이 되어 갈 뿐이었다. 얼음덩어리 조기를 냉동실 문을 열어 다시 집어넣으며 말했다.
"어머니나 많이 잡수세요."
어머니 얼굴에 당황한 빛이 서렸다. 나는 안 보고 싶었다. 며느리들 중에서 그래도 밝은 목소리를 내는 며느리가 갑자기 말이 없어졌으니 집안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주방을 적당히 정리하고 거실로 나왔다. 큰 시숙이 줄곧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연기가 거실의 공기를 엷게 덮어갔다. 나도 가만히 있으면 좋았을걸.
"아주버님 담배를 끊는 게 좋지 않겠어요? 몸에 좋지 않아요."
흡연이 몸에 좋지 않은 일임을 모르는 사람도 있던가? 나는 괜히 말했구나 후회는 하면서도 딱히 할 말이 없었기에 편찮으신 친정아버지 생각이 나서 해본 말이었다.
"제수씨가 언제 담배 한 번을 사주고 그런 말을 하세요?"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더니 나는 말로 되받았다. 거실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남편도 말이 없었다. 시댁 식구들은 친정아버지가 오래도록 서울 병원에 입원해 계셨지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친정아버지의 장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수술이 잘 되었다고 했지만 자신을 관리하기에는 스트레스가 많이 남아있었다. 떨어져 있어 그저 전화 안부 외에는 할 일이 없었기로 안타깝기만 할 뿐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피를 토하면서 응급실로 실려갔는데,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고 했다. 아마도 동맥혈관이 터지면서 피는 폭포처럼 쏟아 지혈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을 거라 내리 추측할 뿐이었다. 큰일을 겪은 본인들은 경황이 없어 앞뒤 생각할 겨를이 없다. 주변에서 진행해 주는 대로 나아갈 뿐이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남아있는 일은 동생들에게 맡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 달 정도 지나고 혼자되신 어머니를 뵙기 위해 혼자 제주를 찾았다. 아버지가 안 계신 어머니는 불안해했다. 모시고 식당에 가서 식사를 대접해 드렸지만 잘 드시지를 못하고 생각에 잠기시곤 하셨다.
"어머니, 나랑 같이 여행이라도 다녀옵시다."
"난 가만히 있고 싶다."
어머니는 손을 내저으며 밖으로 나가기 싫다고 하셨다. 동생 내외에게 어머니를 맡기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어버이날'이 되어 시댁을 찾았다. 갑작스레 친정아버지의 소식을 들은 시댁 식구들은 당황했다. 큰 시숙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내게 쏘아붙였던 일을 민망히 여겼지만 주워 담지 못할 일이었고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식구들은 내게 말없이 조용한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렇더라도 '장례는 잘하고 왔느냐'라고 아무도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앞으로의 내 거취를 생각하게 되었다. 시댁 식구들은 확실히 내 식구가 아니었고, 남편 또한 내 식구가 아닌 그들 식구라고 확신했다. 언젠가는 남편을 돌려보낼 줄 것이고 나도 떠날 것이라고 마음먹게 되었다. 그저 애들을 천덕꾸러기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 애들을 지키고 나를 지켜야 하기 위해서는 내가 강해져야 했다. 나는 힘이 있어야 했다.
어느 조용한 저녁시간에 남편에게 말했다.
"앞으로 친정에는 혼자 다녀올게. 나도 손님이 아닌 자식으로 뵙고 싶어. 그러니 같이 가려고 애쓰지 마. 그리고 누님 댁에는 혼자 다녀. 나는 앞으로 누님 댁에 안 간다."
자기들 피붙이가 아니라고 함부로 하고, 편가르고, 뒷담 하고, 잘못한 일 없이 받는 불이익을 지금부터 참지 않기로 했다. 그 후부터 나는 제주의 친정에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자기 식구 하나 지키지 못하고 보호할 의사가 없는 남자로부터 떨어져 나갈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의지하지 않고 기대를 접으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다. 내 자식들을 지키고 내 가정을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긴 창을 들고 우리 집 현관을 지키는 장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