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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희 Nov 06. 2024

판포리로 가는 길 - 틈( 1 )

  시어머니는 9남매를 두셨다. 맏아들을 낳을 때 시어머니도 아들을 낳으셨다. 먼저 홍역으로 둘을 보냈다고 할 때도 있었다. 대식구 끼니며, 빨래가 그날그날 산더미였다. 빨래는 리어카에 싣고 개울가에 가서 식구들이 같이 빨았다. 아버님은 나이 사십에 암으로 먼저 세상을 뜨셨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세상이 달라졌다. 어머니는 대식구인 가족이 하루하루 근근이 살았다고 회상하듯 눈을 감고 말씀하실 때가 있었다.

  아버님은 눈을 감으실 때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자네는 걱정 없을 거네."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어머니는 오래도록 생각했다고 하셨다. 아마도 자식을 많이 둬서 후에 자식들의 덕을 보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했다고 하셨다. 아버님 마지막 말씀처럼 어머니는 말년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설에 세배 드리는 며느리들에게 '옜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라고 하시며 만 원씩이라도, 아니면 오천 원씩이라도 주셨으면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기에 좋았을 터였다. 보기 드물게 며느리들에게 인색하셨다.

  공무원인 남편을 둔 누나는 친정식구들을 자주 불러들여 다복한 시간을 보내기를 즐겼다. 자주 찾아가는 것이 형제들의 우애를 돈독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을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후에 숨 막히는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헤어질 무렵이면 '엄마가 서운해한다'라는 말로, 살아계실 때 잘해야지'하는 말로 발걸음을 붙들었다. 우리는 아침에 가서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당연시 여기게 되었다. 남편은 무조건 따라야 했다. 행사가 있어 오라고 하기 시작하더니 일상이 되었다. 남편은 '안되겠다'라는 의사 표현을 해본 적이 없었다. 대단히 끈끈한 혈육으로 연결된 피붙이 형제들의 우애가 끔찍할 정도였다. 남편에게는 아내의 생각과 의견을 들을 자리도 없었고 필요가 없었다. 그럴수록 누나와 어머니는 내게 함부로 하며 마음을 긁었다. 결혼 전에 신중함으로 보였던 성격은 우유부단함으로 나타나 내게 분노와 실망을 안겨줬다. 나는 조금씩 피폐해져갔다.

  군인 신분으로 일 이년에 한 번씩 이사 다니느라 저축도 안되고, 애들은 커가고, 승진에 있어서는 자꾸 누락되고, 불투명한 미래로 인해 의욕이 없어졌다. 물론, 남편은 퇴직 후 앞날에 대해 생각이야 있겠지만 어떠한 계획도 얘기하지 않았다. 대화 없는 부부와 예스도 노도 없는 남편, 커가는 아이들, 불러서 마냥 놀고먹자 하는 시어머니와 누나가 우리 집의 모습이었다. 나는 위기를 느꼈다. 내게 맡겨진 아이들을 어떻게 지키고 보호해야 할까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누나는 아줌마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자주 고스톱판을 만들었다. 막내딸이 고등학생이었는데 하교하여 집에 들어오면 안방에 나이 든 엄마들이 와글거렸다. 막내딸은 불만으로 가득했지만 얘기를 하지 않았다. 화투장을 만져보지 못하고 자란 나는 누나의 생활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어머니께 조용히 말씀드렸다.

  "막내도 고등학생이니 애 생각해서라도 아줌마들을 집으로 불러들이는 걸 그만하라고  하세요."

  어머니는 가만히 생각하더니 말씀하셨다.

  "내버려 둬라. 그래야 시간이 잘 간다더라."

   때때로 나는 돈보다 붙들 수 없는 시간을 더 아까워할 때가 있다. 시간이 잘 간다고 하니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나도 내버려 둘 수밖에. 덕이 되지 못하는 딸의 얘기를 며느리에게 들어야 하니 어쩌면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누나네 집에 가는 일로 자주 다투기 시작했다. 우리 가정의 미래를 얘기하고 계획하는 일에는 뒷전이고 '누나네'를 달고 사는 남편에게 나도 진저리가 나기 시작했다. '누나' 얘기만 나오면 얼굴이 굳어졌다. 나중에는 혼자 가라고 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남편은 승진 명단에 자꾸 누락되었다. 그런데도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실망이 되지 않았다. 아직 어린애가 셋이라고 동정의 눈빛을 보내는 엄마들의 눈빛을, 웃음 띤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받아쳤다. 주변에서는 우리는 이제 승진 대상에서 제외되고 후배가 선발 주자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남편들의 발표 날짜가 다가와 집집마다 조용한 가운데 술렁거렸다. 발표날이 되면 집집마다 축하차 찾아올 거라 예상되는 손님들을 위해 간단한 음식과 차를 준비해 두기도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에 들어왔다.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었더니 꽃바구니 몇 개가 줄이어 들어왔다. 교회 권사님과 집사님이 음식을 들고 오셨다. 남편에게서 승진이 되었다는 전화를 받는데 서로 긴 말이 필요가 없었다. 애썼다는 짧은 인사로 전화를 끊었다. 남편이 그동안 사무실에서 겪었을 무시와 설움을 생각하니 먹먹했다. 하나님 은혜 감사할 따름이었다. 우리 집에는 교회 식구들과 선배님들, 후배들이 축하해 주기 위해 북새통을 이루었다. 오랫동안 기다림 끝에 받은 축하의 말씀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남편들의 결과 발표는 보통 추석을 앞두고 하는데, 희비가 엇갈린다. 올해 우리는 밝은 얼굴로 시댁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었고 누나와 매형을 비롯해 다른 다른 형제들과 같이 기쁨을 나눌 수 있다는 일이 말할 수 없이 기뻤다. 남편은 어깨에 힘을 주고 부푼 마음으로 시댁을 찾았다.

  시댁에 도착하자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형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주방으로 우선 들어갔다. 우리는 대식구여서 큰일을 치르려면 우선 냉장고를 비워내야 했다. 냉장고 정리를 하고 싱크대 문을 열어 프라이팬 두어 개를 꺼냈다. 프라이팬은 낡고 오래되어 기름때와 음식 찌꺼기로 부분부분 절어있었다. 나는 동네 그릇가게로 가서 새 프라이팬을 두 개를 사 왔다. 형님은 시어머니 모시고 허구한 날 대식구가 몰려들 때마다 삼시 세끼 챙기고 있는 모습은  딱하기 그지없다. 그러니 일일이 얘기하지 않고 내가 손댈 수 있는 일은 말없이 할 때가 있기도 했다.

  조금 있으니 순서대로 다른 형제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시댁 형제들과 동서들끼리는 특별히 거칠거나 모난 구석이 없어 잘 지내는 편이라,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항상 반갑다. 내일 추석 음식 준비를 위해 주방에서 도마에 칼 두드리는 소리, 나물 볶는 냄새와  거실에서는 전 부치느라 기름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추석을 보내고 돌아와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전화벨이 울려  받았는데, 시댁의 큰 형님이었다. 나는 반갑게 인사했다.

  "네, 형님 어제는 괜찮으셨어요?"

  "자네. 나를 무시하나?"

  "네? 무슨 말씀이세요?"

  "나를 거지로 알고 쓰고 남은 봉투를 내미냐고? 사람 이상해졌네."

  잠시 숨을 쉬고 나서 말을 이었다.

  "형님, 다른 동서들과 함께 봉투를 모았어요. 형님이 안 계시니 장을 보기는 해야 해서 여기서 장을 조금 보고 왔어요. 둘째 형님이 나보고 봉투를 드리라고 했고요. 그리고 형님, 다른 동서들 보다 먼저 가서 청소하고, 냉장고 정리하고, 프라이팬 사다 놓고 준비했는데 뭐가 잘못됐나요?"

  "그랬어? 아니면 말고." 

  형님은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지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가슴이 뛰고 현기증이 났다. 조금 있으니 둘째 형님에게 전화 왔다.

  "자네, 형님 안테 봉투 드리면서 뭐라고 했어?"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생각해 보니 그 사이에 온 식구들이 내가 사람 달라졌다고 뒤에서 욕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의 내막을 굳이 파헤치지 않아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얼떨결에 누나의 부추김을 받은 동서들이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평소에 시댁 식구들에게 전화 안부를 자주 하는 편이었는데 그 이후로 모든 안부전화를 끊었다. 진심을 왜곡 시키는 인사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마음 밑바닥으로 해무 같은 하얀 냉기류가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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