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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희 Nov 20. 2024

판포리로 가는 길 - 위기와 기회( 1 )

  아들이 대학생이 되었다. 고3 생이라고 잘 챙겨주지 못했는데 알아서 진학도 하고 대견할 뿐이었다. 아들은 기숙사에 있으면서 주말에는 집으로 찾아왔다. 같이 외식을 나갈 때면 학교생활을 재미있게 얘기해서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군대를 가야 할 때가 되어 신검을 받게 되었다. 조그맣지만 항상 빨빨거리면서 온 데를 휘젓고 다니던 꼬마가 군대를 간다는 것이다. 신기한 일이었다. 제복을 입은 아빠를 보며 자라서 그런지 아들은 군대 가는 일을 당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신검받을 날짜가 되었다.

  결과를 우편으로 통보를 받았다. 생각 없이 봉투를 열어본 남편과 나는 믿을 수 없는 결과에 아연실색하여 서로를 쳐다보았다. 

  "검진 결과가 왜 이래?"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남편과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를 상황에 말문이 막혔다. 우편으로 보내온 결과 통보에 따르면 내장 기관이 정상이 아닌 수치를 적어놓고 있었다. 혈액검사 결과 심각한 이상수치를 보이므로 종합병원에서 자세한 재검이 필요하다고 적혀있었다.

  아들은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해서 종합검진을 다시 받았다. 결과는 '원발성 경화성 담관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렇게 되도록 어떻게 증상도 없고 통증이 없을 수 있느냐고 되물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의사는 아마도 늘 피곤한 증상이 내 몸의 상태인 양 여기고 있었을 거라고 추측하듯이 얘기했다. '우루사'를 처방해 주고 때에 맞춰서 정기 검사를 하고 증상이 심해지면 간 이식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처방에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아들은 스무 살이다. 앞날에 펼쳐질 '청운의 꿈'이라는 제목 앞에 간이식이라는 결과를 내놓고 있었다. 우리는 아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결과를 종합하여 병무청에 송부했더니 병역면제를 받았다. 군대를 다녀오고 싶었던 아들은 마음이 내려앉는 실망을 느꼈을 터였고 앞날에 대해 어떤 꿈을 갸져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어쩌다 사람들은 병역면제의 결과를 특혜라고 생각하는 말을 할 때도 있었다. 속을 모르는 사람들의 말이라고 치부한다 해도 야속하게 들렸다. 아들은 일단 학교를 휴학해서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고 하여 한 학기를 휴학하기로 했다. 우리도 특별히 반대할 이유도 없게 되었다.

  엄마인 나도 어떤 결정을 내려야 했다. 결혼 후 전업주부로 교회일로 동분서주하면서 애 셋을 키웠다. 큰애의 결과를 앞에 두고 여전히 이런 모습으로 살 수는 없는 일이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뜻하지 않은 어느 날 보건사회부 발신으로 통지서가 날라들었다. 보건사회부와 노동부의 계획으로 유휴간호사에게 교육 후 재취업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간호사이면서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 없이 전업주부로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 이런 우편물이 날아왔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심각한 간호사의 부족으로 병원의 업무가 원활하지 못한 대안으로 내세운 정책의 일환이 내게 해당되었다. 

  다른 업무와는 다르게 간호사는 경력단절 후 재취업하기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전문분야인 관계로 공부가 다시 필요했고 내게는 이십 년 넘게 단절되다 보니 적응할 자신이 전무했다.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지낼 수도 있었지만 내게는 결단을 요구했다. 통지서에는 6개월간의 교육을 이수한다고 되어 있었다. 갑자기 이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기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알고도 모른척한다면 앞으로 어떤 기회도 내게 오지 않아."

  나는 하나님을 들먹였다. 답답한 나를 불쌍히 여겨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일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기재된 전화번호를 찾아 나는 유휴간호사 교육을 신청했다. 

  "취업이 안되면 봉사활동이라도 해야지. 그러면 하나님이 혹시 나를 불쌍히 여길지도 몰라."

  재취업에 자신이 없었던 나의 중얼거림이 내 귀에 들렸다.

 

  교육은 일주일에 두 번을 받게 되며, 아침 9시부터 시작해서 오후 6시에 끝났다. 가만히 앉아서 강의를 들었던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에 가물가물했다. 교육생들은 하루의 강의가 끝나면 초주검이 되었다. 허리가 욱신거리고 다리가 부었다. 딱딱한 의자에 계속 앉아있어 엉덩이는 욕창이 생길 지경이었다.

  "강의 끝나기 전에 우리가 죽겠다."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교육생들의 평균 나이대는 삼십 후반에서 사십 후반이며 26명이 지원서를 제출했다. 둘은 시작 전 교육을 취소한다고 했다. 24명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6개월간의 교육 중 현역 전공 교수님들의 강의와 실습과정을 이수하기로 되어 있었다. 현역 교수님들의 강의는 딱딱한 의지에 앉아 있기가 힘들기는 했지만 학생시절로 돌아가 교수님들의 강의를 다시 듣는 즐거움도 누렸다. 신기한 일은, 그때는 이해가 안 되던 내용이 굳이 외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교수님들은 농담하는 일 없이 무뚝뚝하게 한 시간 강의를 충실하게 이어갔고 귀로 듣는 강의는 저절로 이해가 되었다. 겨울에 시작한 교육이 봄이 되면서 실습과정도 끝났다.

  마지막 날 각 병원의  간호과 대표분들이 교육생들을 병원으로 유치하기 위해 설명회를 가졌다. 나도 어떻게든 병원을 택하여 취업을 해야 했다. 첫 순서로 H병원의 간호부장님의 설명이 있었다. 나는 결혼 후 병원에 대한 정보나 관심이 전혀 없었기로 간호부장님의 이미지와 급여 부분이 마음에 들어 H병원에 취업하기로 했다. 

  이력서를 들고 H병원 간호과를 찾았다. 교육생 중 H병원 지원자는 나 혼자였다. 나중에 들은 일이지만 H병원에 대한 얘기가 무성했다. 한마디로 간호사들에게 최악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나는 미리 들은 얘기가 아니었으므로 겁 없이 H병원을 노크한 것이었다.

  간호과에서 부장님을 면담하고 병동으로 배정되어 수간호사와 팀원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가운을 받아와서 다림질을 했다. 월요일부터 출근하기로 정해졌고 출근 시작 전에 필요한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전업주부로 있다가 이제 직장인 된 것이다. 일을 놓은 지 이십 년이 지났는데 잘할 수 있을지 나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동안의 시간이 병원에도 새롭게 변해있을 거라는 기대는 가져봄직했다. 다림질을 끝낸 가운을 옷걸이에 가지런히 벽에 걸었다. 의료용 소모품 몇 가지를 가지고 주사 놓는 연습도 해보고 새로 나온 반창고를 붙이는 연습을 했다.

  학교를 마치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막내가 벽에 걸린 병원 가운을 보며 놀라워했다.

  "와! 엄마 진짜 가호사였어요?"

  "응. 엄마는 진짜 간호사였어." 

  집안일만 하는 엄마를 보다가 벽에 걸린 유니폼을 보니, 엄마는 정말 간호사였다고 확인하듯이 말했다.

  나는 놀라워하는 막내딸을 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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