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를 읽고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허진 옮김. 다산북스. 2024
클레어키건 1968년 아일랜드 위클로에서 태어났다. 17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로욜라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가디언》은 키건의 작품을 두고 "탄광 속의 다이아몬드처럼 희귀하고 진귀하다"라고 평한 바 있다. 이는 그가 25년간 활동하면서 단 5권만의 책을 냈는데 그 모든 작품들이 얇고 예리하고 우수하기 때문이다.
키건은 1990년 첫 단편집인 『남극』으로 루니 아일랜드 문학상과 윌리엄 트레버 삼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2007년 두 번째 작품 『푸른 들판을 걷다』를 출간해 영국제도에서 출간된 가장 뛰어난 단편집에 수여하는 에지힐 상을 수상했다. 2009년 쓰인 『맡겨진 소녀』는 같은 해 데이비 번스 문학상을 수상했다. 《뉴욕 타임스》 '21세기 최고의 책'에 선정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2022년 오월상(정치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같은 해 부커상과 래스본즈 폴리오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최근작 『너무 늦은 시간에』는 《뉴요커》에 게재되었고 영국도서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2022년 아일랜드 올해의 여성 문학상, 2023년 올해의 작가상, 2024년 지크프리트렌츠상과 셰이머스 히니 문학상을 수상한 키건의 작품들은 국제적인 호평을 받으며 30개 이상 언어로 번역되었다.
'양동이와 그 안의 물에 반사된 소녀의 모습'이라는 키건을 사로잡은 한 이미지에서 비롯된 『맡겨진 소녀』는 한 소녀가 먼 친척 부부와 보내는 어느 여름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출간 이래로 교과과정에 줄곧 포함되어 아일랜드에서는 모두가 읽는 소설로 자리 잡았다. 이 작품은 2022년 콤베어리드 감독에 의해 영화 『말없는 소녀』로 제작 되었다.
허진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이화여자대학교 동번역대학원 번역학과를 졸업했다. 옮긴 책으로 조지 오웰의 『조지 오웰 산문성』, 샐리 루니의 『친구들과의 대화』, 엘리너 와크텔의 『작가라는 사람』, 지넷 윈터슨의 『시간의 틈』, 도나 타트의 『황금 방울 새』, 마틴 에이미스의 『런던필즈』 와 『누가 개를 들여놓았나』, 나기브 마푸즈의 『미라마르』, 아모스 오즈의 『지하실의 검은 표범』 등이 있다.
내용
주인공 소녀는 덥고 환한 일요일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엄마의 고향인 해안 쪽을 향해 웩스퍼드 깊숙이 달린다.
무심하고 거칠며 매너가 없는 아버지, 다섯째 아이를 임신한 채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 일과 밭일까지 신경 쓰느라 지친 어머니, 넉넉하지 않은 경제적 형편으로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던 주인공 소녀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만 아이가 없는 먼 친척 집에 맡겨진다. 아주 살갑게 대하지는 않지만 아이가 첫날밤 침대에 오줌을 싸도 모르는 척 습한 방에 재운 자기 잘못이라고 말하는 아주머니를 통해 친절에도 배려가 필요함을 알게 한다. 바깥일을 하고 들어와 자연스럽게 식사 준비를 같이 하고 아이에게 매일 우편함까지 달리기를 시키며 시간을 재주는 아저씨와 함께 주인공 소녀는 처음으로 애정 어린 관심과 보살핌을 받게 된다. 떨어진 루바브 줄기 하나 주울 줄 모르고 배려와 친절을 모르는 아버지와 무척 다르다. 아이는 킨셀라 부부의 살뜰한 보살핌 속에서 제대로 대답하는 법을 배우고 책 읽는 법도 배우며 따뜻한 계절을 보낸다. 뉴스에서 들려오는 단식 투쟁 소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1981년의 아일랜드는 무척 혼란한 상황이지만 킨셀라 부부의 집에서 보내는 여름은 평화롭기만 하다. 킨셀라 부부의 집에 있던 남자애 옷만 입다가 아저씨 부부와 함께 처음으로 시내에 나가서 제대로 된 옷을 산 날, 아이는 동네 초상집에 갔다가 킨셀라 부부의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된다.
초상집에 다녀와서 아저씨와 해변으로 긴 산책을 갔던 아름다운 밤에 킨셀라 아저씨는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다"라고 말한다. 킨셀라 씨가 이웃에게 주인공 소녀에 대해서 "해야 하는 말은 하지만 그 이상은 안 하는 아이"라고 칭찬하거나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주머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라고 전하고 싶어 하는 아이의 생각 등, 반복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불화의 원인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기 때문임을 알게 한다. 곧이어 건강한 남동생이 태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행복했던 여름은 끝난다. 소녀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누구에게나 집은 평안하며 행복하고 애정이 깃든 곳이 아니라 해도 돌아가야 할 곳이다. 평생을 통하여 잠시나마 보살핌과 진한 애정을 받은 기억이 있다면 살아가는 동안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어려움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고 말하기에 아깝지 않다.
집으로 데려다주고 떠나는 아저씨에게 있는 힘껏 달려가 안긴 채 자신을 데리러 오는 아빠를 보며 "아빠, 아빠"라고 부르는 아이의 말은 뒤가 보이지 않는 아저씨에게 자기 아빠가 오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 부르짖음에 그동안 자신을 사랑으로 돌봐준 킨셀라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르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명확하지 않은 암시적인 표현으로서 읽는 이로 하여금 진한 수채화 물감이 퍼지는 여운으로 남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