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자전거 여행 1' 을 읽고
김훈지음/이강빈 사진. 자전거 여행. 문학동네. 2024.
김훈
1948년 서울 출생.
2000년까지 여러 직장을 전전.
소설 『하얼빈』 『저만치 혼자서』, 산문 『연필로 쓰기』 『라면을 끓이며』 외 여럿
이강빈
1958년 덕적도 출생.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졸업.
『주부 생활』 『 TV 저널』 등의 사진작가를 거쳐 프리랜서로 활동 중.
자전거 타는 사람
김기택
당신의 다리는 둥글게 굴러간다
허리에서 엉덩이로 무릎으로 발로 페달로 바퀴로
길게 이어진 다리가 굴러간다
당신이 힘껏 밟을 때마다
넓적다리와 장딴지에 바퀴무늬 같은 근육이 돋는다
장딴지의 굵은 핏줄이 바퀴 속으로 들어간다
근육은 바퀴 표면에도 울퉁불퉁 돋아났다
자전거가 지나간 길 위에 근육 무늬가 찍힌다
둥근 바퀴의 발바닥이 흙과 돌을 밟을 때마다
당신은 온몸이 심하게 흔들린다
비포장도로처럼 울퉁불퉁한 바람이
당신의 머리칼을 마구 흔들어 헝클어뜨린다
당신의 자전거는 피의 에너지로 굴러간다
무수한 땀구멍들이 벌어졌다 오므라들며 숨 쉬는 연료
뜨거워지는 연료 땀이 솟는 연료
그래서 진한 땀 냄새가 확 풍기는 연료
그 연료가 타는 힘으로 당신의 다리는 굴러간다
당신의 2기통 콧구멍으로 내뿜는 무공해 배기가스는
금방 맑은 바람이 되어 흩어진다
투명한 콧김이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달달달달 굴러가는 둥근 다리 둥근 발
둥근 속도 위에서 피스톤처럼 힘차게 들썩거리는 둥근 두 엉덩이와 둥근 대가리
그 사이에 더 가파르고 휘어지는 당신의 등뼈
_김훈의 자전거를 위하여
프롤로그
'신비'라는 말은 머뭇거려지지만, 기진한 삶 속에도 신비는 있다.
오르막길 체인의 끊어질 듯한 마디마디에서, 기어의 톱니에서, 뒷바퀴 구동축 베어링에서, 생의 신비는 반짝이면서 부서지고 새롭게 태어나서 흐르고 구른다. 땅 위의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고 땅 위의 모든 산맥을 다 넘을 수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안면도 -
이 세상의 어떠한 숲도 초라하지 않다. 숲은 그 나무 사이사이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낯선 시간들의 순결로 신성하고, 현실을 부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불온하다. 유림의 숲은 불온하고, 유가적 가치와 질서로부터 소외되어 숲으로 모여든 무리로서의 산림은 더욱 불온하고, 소외된 무장집단으로서의 녹림의 불온은 이미 작동하는 불온이다. 가장 늙은 숲이 가장 새로운 숲이다. 숲의 힘은 오래된 것들을 새롭게 살려내는 것이어서, 숲속에서 시간은 낡지 않고 시간은 병들지 않는다.
봄의 안면도에서는 겨울을 다 지난 후에도 소나무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 곧고, 높고, 힘센 나무들의 개별성은 자존의 거리를 정확히 유지하면서 숲을 이루어, 나무들의 개별성은 숲의 정체성 속에 파묻히지 않는다. 안면도의 소나무들은 붉고 곧은 줄기를 높이 올려가다가 맨 꼭대기에서만 가지가 퍼지고 잎이 돋는다. 아무 데서나 가지를 뻗어 늘어뜨리지 않는다.
숲의 표정-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날, 숲의 온갖 나무들은 함께 젖고 함께 흔들리지만, 비가 멎고 바람이 잠든 아침에 숲을 찾으면 젖은 나무들은 저마다 비린 향기를 뿜어내고, 잎 사이로 흔들리는 아침 햇살 속에서 나무들은 다들 혼자서 높다. 나무들은 뚝뚝 떨어져서 자리 잡고, 그렇게 떨어진 자리에서 높아지는데, 이 존엄하고 싱그러운 개별성을 다 합쳐가면서 숲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안면도에서는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고 달려도 이처럼 잘생긴 소나무 숲이다. 안면도를 떠날 때 비가 내려, 젖은 숲은 젖은 향기를 품어냈다. 숲의 신성은 마을 가까이 있고,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오대산의 전나무 숲과 가리왕산의 단풍나무숲과 점봉산의 자작나무 숲들도 일제히 깨어나고 있을 것이었다.
숲은 가까워야 한다. 숲은 가까운 숲을 으뜸으로 친다. 노르웨이의 숲이나 로키산맥의 숲보다도 사람들의 마을 한복판에 들어선 정발산(경기도 일산동. 내가 사는 동네)의 숲이 더 값지다. 숲은 가깝고 만만하지만, 숲이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게 되는 까닭은 그곳이 여전히 문화의 영역이 아니라 자연이기 때문이다.
다시 숲에 대하여
전라남도 구례 -
5 월의 산에서 가장 자지러지게 기뻐하는 숲은 자작나무 숲이다. 하얀 나뭇가지에서 파스텔톤의 연두색 새잎들이 돋아날 때 온 산에 푸른 축복이 넘친다. 자작나무 숲은 생명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작은 바람에도 늘 흔들린다. 자작나무 숲이 흔들리는 모습은 잘 웃는 젊은 여자와도 같다. 자작나무 잎들은 겨울이 거의 다 가까이 왔을 때 당에 떨어지는데, 그 잎들이 태어나서 땅에 떨어질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면서 반짝인다. 그 이파리들은 이파리 하나하나가 저마다 자기 방식대로 바람을 감지하는 모양이다. 그 이파리들은 사람이 느끼는 바람의 방향과는 무관하게 저마다 개별적으로 흔들리는 것이어서, 숲의 빛은 바다의 물비늘처럼 명멸한다.
숲은 죽지 않는다
강원도 고성 -
건강한 숲이란 키 작은 나무에서부터 키 큰 나무에 이르기까지 온갖 나무들이 모여사는 숲이다, 사람이 보기에 무질서하고 어수선한 숲이 건강한 숲이다. 이런 숲이 복원력이 좋고 재나에 대한 저항력이 크다. 키 작은 활엽수들이 먼저 바라에 씨앗을 날려 불탄 땅에 싹을 틔우고, 타고 남은 그루터기들이 움싹을 길러서 숲은 저절로 회복되어가고 있었다. 숲이 꼴을 갖추어가자 벌레와 작은 짐승들도 저절로 모여들었다. 다 저절로 모여들었다. 다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고, 사라이 공들이고 돈 들여서 한 일이 아니다. 숲은 저절로인 것이다.
'건국 이래' 때 타버린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의 숲은 지난 4년 동안 저절로 스스로를 키워왔고, 검고 붉은 산을 푸르게 바꾸어 놓았다. 이 숲의 일부가 지난 4월의 '단군 이래' 때 또 불타버렸다. 인공조림 구역도 탔고, 자연복원 구역도 탔다. 영동의 숲은 타고 또 탔다. 인공조림한 숲은 나무의 대열이 줄을 맞추어 들어서게 되는데, 다 불타버린 숲은 시커먼 그루터기들만 일렬종대로 남아 있었다.
거듭 불타고 거듭 살아나는 이 숲이 '단군 이래'의 재난을 겪고 나서도 또 한 번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질문은 어리석어 보인다. 숲은 사람의 바람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 기어이 다시 살아난다.
숲은 숨이고, 숨은 숲이다
광릉 숲에서 -
깊은 숲속에서는 숨 또한 깊어져서 들숨은 몸속의 먼 오지에까지 스며드는데, 숲이 숨 속으로 빨려 들어올 때 나는 숲과 숨은 같은 어원을 가진 글자라는 행복한 몽상을 방치해둔다. 내 몽상 속에서 숲은 대지 위로 펼쳐놓은 숲의 바다이고 숨이 닿는 자리마다 숲은 일어선다.
p259 다시 펴내며
세월의 풍화작용을 견디어낼 수 있는 것은 없다. 10여 년 전에 기록하고 촬영한 현장과 사람들의 표정은 이제 그 모습대로 남아 있지 않다. 거기에는 세월의 힘과 인간의 파괴 작용이 겹쳐있다.
그 현장을 다시 찾아가서 바뀜의 의미를 살피는 글을 쓰려 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 책과 현장은 엄청난 거리로 멀어졌다. 내 게으름에 대한 변명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지나가서 없어진 것들을 그대로 살려서 보이려는 뜻을 이해받고 싶다.
나의 생각
나도 숲을 좋아한다. 어릴 때는 바다를 좋아했다. 바다 근처에서 자랐고 놀기가 좋았으니까. 어른이 되어서는 숲이 좋아졌다. 현란한 글로 숲을 찬양할 수 없어도 숲으로 들어가면 무거운 생각들이 가벼워진다.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누비면서 귀한 명소들을 보여주는 데도 숲속에서 멈춰 오랫동안 숲의 향기를 음미했다. 나 또한 숲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고 숲을 좋아하기에 작가의 숲에 대해 쓴 글을 위에 옮겨 보았다.
숲으로 들어가서 곧은 나무나 구부러진 나무, 하늘을 가린 침엽수나 활엽수 등 나무들을 바라볼 때는 생각이 많아지면서도 딱히 글로서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작가의 글을 읽을 때는 거침없는 표현에 주눅이 들면서도 나도 이런 느낌을 안다고 흉내를 내 보려고 기를 쓴다. 좋으면 좋은 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이다.
나는 자전거에 트라우마가 있어 자전거 타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다. 어릴 때 아스팔트 도로에서 자전거 연습을 하다가 동네 슈퍼 배추 더미를 들이받은 후부터 자전거와는 인연을 끊었다.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창고에 처박아 놓은 자전거를 꺼내 햇볕을 쬐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동차를 타고 날리는 풍경을 바라볼 때와 자전거를 타고 땀을 흘리며 가까이 보는 풍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는 있으나 죽기 전에 자전거를 탈 기회가 올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나를 그리며 눈에 비치는 세상을 글로써 노래하고 싶어졌다. 혹 보조바퀴를 단다면 가능한 일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