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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희 Apr 30. 2024

보리밭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이지 않고

  저녁노을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차를 타고 가다 넓게 펼쳐진 보리밭을 보고 한편에 차를 세워놓고 밖으로 나왔다. 보리가 어느새 누런색을 띠기 시작하면서 익어가고 있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청보리 축제도 열렸다는데 청보리는 보지도 못하고 벌써 보리는 익어가고 있었다. 내가 여유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밖으로 잘 다니지 않던 터라 마당에 심어둔 나무와 화초를 보며 싹이 트고 잎이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름 날씨와 계절을 민감하게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간과한 것이 있었다. 우리 집 마당에 심은 모든 나무와 화초는 피고 지는 속도가 다른 곳과는 많이 늦다. 하다못해 집 앞 도로변에 심어둔 달맞이꽃  조차도 맨 나중에 피고 진다. 

 다른 곳에서 벌써 화사하게 피어있는 루즈베키아도 우리 집은 아직 키가 자라는 중이다. 


  박화목 작시, 윤용하 작곡인 '보리밭'은  서정적인 내용과 멜로디로 유명한 곡이다. 노래와 가사 내용답지 않게 육이오 전시 중에 만들어졌다는 얘기도 특이하게 들린다. 육이오가 어떤 때인가. 전시 중이다.

  우리나라가 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국민이 먹고사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시절이었으나 지금 세대는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남의 나라 얘기처럼 말하기도 한다. 환갑을 훌쩍 보낸 나도 전쟁을 직접 겪지는 않았으나 자라는 동안 넉넉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다행히 집안의 어른들의 악착같은 생활력으로 때를 굶는 일은 없었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자주 말씀하셨다. 

 "집안에 돈은 없어도 마루 한편에 보리쌀은 쌓아두고 살았다."라며 자랑스러워하셨다. 냉장고가 없던 여름, 삶은 보리쌀은 부엌과 가까운 서늘한 기둥에 매달렸다. 꿉꿉하고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은 저녁을 지으려던 보리쌀이 고슬거리지 않으면 어머니는 삶은 보리를 씻고 또 씻어 할머니의 잔소리를 보태 밥을 하셨다.

  바깥채에 피난 왔다는 가족에게 세를 줬었는데 할머니는 식사때마다 그 집 흉을 봤다. 남의 집 세를 살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다는 이유에서다. 후에 그 집 딸은 내 친구가 되었다.

  어머니는 제삿날이 되면 자식들을 자정까지 재우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하얀 쌀밥을 먹이기 위해서다. 그러나 무심한 자식들은 낮에 뛰어노느라 잠을 이기지 못해 아침이 돼서야 조금 남아있는 차가운 쌀밥을 먹으면서 어머니의 푸념을 들어야 했다.    

  학교에서는 도시락 검사를 했었다. 쌀과 보리를 섞어 혼식을 해야 한다는 취지였으나 우리 집은 상관없었다. 밥에는 늘 보리가 섞여있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흰쌀이 한 줌 섞여 밥을 지었고 또 시간이 흐르니 쌀과 보리가 엇비슷하게 섞여 밥은 점점 하얘져갔다. 가마솥에 장작불을 피워 밥을 짓는 냄새는 집안을 풍요롭게 했고 가끔은 뜸 들인다고 아궁이에서 꺼낸 빨간 숯에 굽는 생선 냄새가 코를 황홀하게 했다. 

  남들은 누룽지가 고소하고 맛있다고 하는데 나는 누룽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밥을 지을 때마다 가마솥 밑바닥에 밥을 눌어붙게 만든다고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야단을 맞는 일이 종종 있었다. 어머니는 할머니의 야단이 무서워서 가끔 누룽지를 긁어내어 뒤꼍에 숨기는 일도 있었다. 어머니는 왜 맨날 밥을 눌어붙게 만들어서 할머니의 야단을 들어야만 할까. 속상할 때가 많았다.

  우리 집에 큰 전기밥솥이 들어왔다. 할머니에게는 신주 단지였고 어머니는 야단맞을 일이 없어 좋았다. 


  결혼해서 시어머니가 우리 집에 얼마간 계시다가 다녀간 적이 있었다. 그때 풍년 압력 밥솥을 사용해서 밥을 지었는데 가스불을 써야 했다. 나는 다른 건 잘 못해도 밥 하나는 잘 짓는다.

  "너는 어떻게 밥솥에 밥 한 톨 눌어붙지 않게 밥을 지을 수가 있니?"라고 시어머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밥을 태워 일부러 누룽지를 다시 만드셨다. 시댁에서는 누룽지를 쌓아놓고 간식처럼 먹었는데 나는 쌀이 아깝다는 생각에 먹어보라는 식구들의 말에도 일언지하 거절했었다. 

  

  "보릿고개"라고 불리던 시절을 보내기도 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의 삶도 과거를 생각하면 기대 이상으로 윤택해졌다. 보리가 아니라 쌀이 남아돌아 잘 먹지 않는다고 하니 격세지감이다.

  앞을 바라보아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그려야 하는데 육십 년을 넘기고 보니 자꾸 옛날 일을 들추어 내는 일이 잦아지는 걸 보면 아마도 나이를 먹기는 하는가 보다. 어른들이 "옛날에는,,,." 하면서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 할 때마다 타박했었다

  나 역시도 어른들처럼 그럴 나이가 됐지만 들어줄 사람이 없으니 글이라도 써서 남겨야 이디 음에 했던 말을 자꾸 하는 습관을 자제하게 될 거라고 생각이 된다.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요엘 2:28)"라고 성경에는 말한다.


  비록 육신이 노화되어 관절이 팔팔하지 않고 삭신이 아파진다 하더라도 과거를 남기고 꿈을 꾸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늙은이로 남으련다.  탄력 있는 피부가 늘어지고 얼굴에 팔뚝에 검버섯이 군데군데 생김은 열심히 살았다는 노인에게 주는 훈장이며 면류관일 것이다. 그저 고집스럽지 않고 지혜롭게 나이 들고 싶을 뿐이다.


  우리의 배를 채워주고 놀잇감이 다양하지 못하던 어린 시절, 누가누가 보리피리를 길게 소리 내나 내기하던 어린애들은 이제 옆에 없다. 저 보리 수확을 끝낼쯤이면 이곳을 다시 찾아 보리피리를 불어 보고 싶다.

  그때 불고 들었던 소리가 여전할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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