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행스럽다. 그러나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김상국
중국 리커창 전 총리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싶다. 나는 중국과 일본을 그렇게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지난 긴 역사 동안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과 횡포를 생각하면 그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커창 총리의 죽음은 나에게 여러 가지 것을 생각나게 한다.
모택동과 주은래, 모택동과 등소평 그리고 등소평과 리커창이 중국 인민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한 여러 가지 일들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1) 모택동과 등소평
중국의 최근세사에서 모택동과 주은래 그리고 등소평의 역할은 간단하게나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 누가 뭐라 해도 모택동은 탁월한 전략가이고,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다. 그는 대장정이라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길고 긴 투쟁의 과정에서 자기보다 100배 이상의 권력을 가진 장개석을 대만 섬으로 몰아내고 공산혁명을 완수한 사람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설과정까지만 살펴보면 그는 대단히 훌륭한 전략가이고 특출한 능력자이다. 그러나 공산혁명 성공 이후 그의 행적을 보면 잔인하고, 매정하며 자기 권력 수호에 방해되는 사람은 가차 없이 제거한 잔인무도한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소련의 스탈린과 매우 비슷한 사람이다.
다만 스탈린은 죽어서 숙청을 당했지만, 모택동은 지금도 천안문 광장에 초대형 사진이 걸려있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라고 하겠다.
모택동은 중국공산당 초기 주요인사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유학을 가지 않은 사람이다. 주은래, 등소평 모두 불란서 유학파들이다. 혁명초창기 때 유학파와 비유학파 사이 중국 공산화에 대한 전략에 큰 차이가 있었다. 유학파는 서구에서 배운 대로 ‘도시 노동자계급의 혁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토종』 공산주의자인 모택동은 “중국에는 도시 노동자 계급이 거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중국 인민의 대부분인 농민 중심의 소비에트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초기에 그의 정책은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1935년 대장정 중에 그의 이론(마오이즘)은 인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장정 기간 중 모택동이 벌린 ‘경작자 중심의 토지 개혁 정책’은 다수 농민들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거기에 힘입어 부패와 수탈로 얼룩진 장개석 정부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등소평은 대(大) 지주집안 출신이었고, 유학파였지만 그는 모택동의 편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모택동에 의해 1945년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1949년 중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정치국 상무위원과 중국공산당의 비서장이 되어 나라의 일상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 후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을 일으켰고, 모택동과 생각이 다른 등소평은 실각하게 되고 당직에서 은퇴하였다. 모택동의 사후 재등장한 그는 중국 최고의 실권자가 되어 중국을 개혁 개방으로 이끌었다. 그 유명한 핑퐁외교, 판다외교 그리고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주장도 그 때 나온 것이다.
중국 현대화와 경제 대국화를 논할 때 등소평의 역할은 아무리 작게 평가하여도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작지만 당차고, 부드럽지만 강한 부도옹(不倒翁)의 이미지는 그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낸 말이라고 생각한다.
(2) 모택동과 주은래
주은래와 등소평은 불란서 유학 시절에 만났다. 주은래가 등소평 보다 여섯 살 위로 주은래는 등소평을 동생과 형의 관계로 생각하였으며, 매우 서로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등소평이 모택동에 의해 고난을 받던 시절에도 주은래는 그를 음양으로 많이 도와주었다.
사실 주은래는 모택동의 정말로 충실한 조력자였다. 모택동의 강하고 야심차고 잔인한 행동에 대비하여 그는 절대로 모택동을 비난하지는 않았으며, 모택동이 저지른 잘못을 항상 뒤에 따라다니면서 부드럽게 치유해 주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어떤 때 모택동은 그의 부드러운 태도에 못마땅한 적도 있었지만 그의 역할이 워낙 막중하였고, 또한 자기 정책 수행을 위해 그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내치지 않았었다.
그리고 주은래는 절대로 제2인자 자리를 넘어서지 않으려고, 극히 노력하였다. 이 점은 모택동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주은래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두 가지 예를 소게하겠다. 하나는 모택동의 주치의인 이지수가 쓴 『모택동의 사생활』이란 책에서 읽은 내용이다. 주은래는 늙어서 특히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는 날 모택동은 자기의 주치의인 이진수를 보내 그를 치료하게 하였다. 그의 글에는 이런 부분이 있었다.
이진수는 초라하고 볼품없는 주은래의 늙은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이 수십 년간 중국의 제2인자 역할을 한 바로 그 사람이란 말인가? 라는 생각을 나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은래도 여러 번 “나는 2인자의 역할을 떠날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이 점에서 그는 등소평과는 매우 다른 사람이었다.
또 하나는 주은래 부인과의 관계다. 주은래는 안타깝게도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주위에서 그리고 그의 아내인 등영초 또한 첩실을 얻을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주은래는 “왜 내가 자식이 없단 말이오. 중국의 모든 청소년들은 다 나의 자식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주은래는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현재도 가장 사랑 받는 2인자이고, 등영초는 ‘대륙의 큰 언니’라는 칭송을 듣고 있다.
내가 보기에 모택동은 뛰어난 혁명가이고 전략가이지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모택동은 ‘사람은 말하는 도구’라고도 했음). 여기에 비해 주은래와 등소평은 뛰어난 혁명가는 아니었지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매우 컸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주은래는 제2인자로서 애민(愛民)을 하였다면, 등소평은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백성을 구휼하려고 애쓴 사람이라고 평하고 싶다.
인간의 숙명은 언젠가는 죽는 것이다. 말년이 가까운 등소평은 중국의 미래, 특히 공산당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지도자들의 한결 같은 특성 중 하나는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 모두 그러하였다. 그 세 사람 모두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끼고 읽었다고 한다. 그러나 등소평의 역사관은 다른 두 사람들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는 군주보다 백성이 우선이었고, 그리고 공산주의 체재를 ‘유지하면서’ 개혁개방을 해야 한다는 굳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참고로 천안문 자유민주화 시위가 있었을 때, ‘탱크로 시위 젊은이들을 밀어버리라.’고 명령한 사람이 바로 등소평이다.
중국 공산국가의 기본 틀을 만든 등소평이었기에, 그는 자기 사후(死後) 중국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수천 년의 역사를 보면 중국 왕조는 결국 부패와 무능력 그리고 내부자들 간의 권력투쟁에 의해 왕조가 바뀌었다. 그러면 공산주의 왕조라고 해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고심을 한 후 몇 가지 대안을 내놓았다. 미래 중국의 잠재적 권력집단을 세 개의 큰 구릅으로 나눈 것이다.
하나는 조상대대로 권력과 부의 중심지였던 상해를 토대로 뿌리 깊은 권력 집단인 ①상해방, 공산혁명의 초창기 멤버이고 그 후 중국 권력 최상부를 차지한 구릅의 자제들인 ②태자당, 그리고 아무런 기존 배경 없이 그저 똑똑한 머리와 부지런함으로 자기를 들어낸 ③공청단(공산청년단)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세 집단 간에 권력을 차례대로 순번으로 돌아갈 것을 공표하였다. 즉 공산당 안의 미래 권력투쟁의 불씨를 자른 것이다.
그리고 북경방의 두목인 강택민(장쩌민)을 불렀다. “나와 『공개적』으로 약속을 해라. 내가 나의 권력을 너에게 넘기는 대신, 너는 두 번의 임기 후 너의 권력을 공청단(후진타오)에게 넘겨라. 네가 약속을 지키면 나도 너에게 주석직을 넘기겠다.” 강택민은 당연히 약속을 하고 등소평으로부터 권력을 승계 받았다.
이런 전략을 새움으로써 등소평은 ‘중국공산당 내(內)의 권력 암투가 벌어지는 것을 막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한번 잡은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등소평의 말을 들을 일이 없다. 하지만 공개적인 약속을 하였기에, 2002년 공청단의 후진타오에게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직을 넘겼다. 그러나 깨끗하게 물러나지 않고, 그 뒤에도 국가주석직과 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상당기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후진타오의 내치(內治)에 방해공작을 폈다.
이런 강택민의 간섭에 너무 마음이 상한 후진타오는 공산당 입당도 8번이나 거절되고, 9번째에 겨우 입당이 허락된 시진핑(習近平)에게 주석직을 넘겼다. 아마 그도 시진핑이 잠재적 호랑이인줄 모르고, 자기도 강택민처럼 권력 승계 후 상왕(上王) 노릇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권력은 시진핑에게 넘어갔고, 다만 총리직만은 공청단인 리커창에게 주어졌다.
사실 정치는 권력투쟁의 현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일단 권력을 잡은 시진핑은 너무도 착실하게 자기 권력 공고화를 위해 반대세력의 숙청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시진핑의 권력 강화 과정은 논외로 하겠다. 다만 시진핑과 리커창이 서로 간 정책의 차이에 대해서만 논의하겠다.
시진핑과 리커창의 주요정책을 대비하면 다음과 같다.
; 공산당의 구호는 항상 너무 멋있다. 다른 나라 정치에서도 자기 정체를 숨기고 말하는 사람들의 구호 또한 언제나 아름답다. 시진핑은 권력을 잡자마자, 등소평의 선부론(先富論)을 버리고, 공동부유론(共同富裕論)을 주장하였다.
선부론은 “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먼저 부자가 되게 하자. 그리고 다음 사람들도 또 그 다음 사람들도 따라서 부자가 되게 하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선부론은 언뜻 달리 생각하면 “아니 그럼 모두가 잘 살게 될 때까지 보통 사람들은 계속해서 가난하게 살라는 말이냐?”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여기에 비해 공동부유론(共同富裕論)은 너무나 간단하고 명확하다. “우리 『모두』가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얼마나 간단하고 명확한가? 이해하는데도, 공감하는데도 전혀 어려움이 없다. 게다가 시원하고 멋까지 있다.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문제는 『실현 가능성』이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다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부자의 재산을 나눠 갖거나, 부자들의 기업을 빼앗는 행위는 결국 공동부유가 아니라 『공동가난』을 가져올 뿐이기 때문이다.
시진핑의 이러한 공동부유론에 대해 리커창은 등소평과 같은 ‘선부론’과‘성장론’을 주장하였다.
시진핑은 2020년 ‘중국은 소강사회(小康, 샤오캉 사회)를 이룩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샤오캉 사회(소강, 小康사회)란 단어 그 자체가 설명하는바와 같이 ‘누구나 어느 정도 평안하게 잘 먹고 잘 사는 사회’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소강사회가 이루어졌다는 말은 곧 시진핑의 공동부유론(共同富裕論)이 성공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 대해 총리였던 리커창은 “중국 인구 14억 중에 거의 절반인 6억 명의 수입이 월(月) 1,000위안(17만원/월)에 불과하며, 집세를 내기조차 힘들다.”라고 말하였다. 즉 중국인구의 ①절반 정도가 극빈층이며, 부자라고 해도 ②동부해안가 그리고 대도시의 일부 인구가 부자일 뿐이며 ③ 중국 내 빈부격차 문제는 너무 심각하다고 하였다.
나도 여러 이유에서 중국을 자주 방문하였다. 상해, 북경, 중경 등을 방문하면서 그 발전 속도와 건물규모 등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 곳을 살짝만 벗어나면 고색창연한 집들이 대부분이고, 자기 집 앞에서 멀거니 그저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고 이상하다고 느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중국은 과거 30여 년간 정말 놀라운 고속 성장을 하였다. 1971년 닉슨과 등소평의 핑퐁외교, 판다외교 이후, 중국의 발전은 평균 10% 근처, 때로는 14% 발전하는 놀라운 성장을 보였었다.
우리나라도 한때 초고속 성장을 할 때 8%대의 성장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 7, 80위권의 작은 국가인 대한민국이었다. 중국처럼 세계 2,3위의 국가가 그런 고도성장을 한다는 것은 경제학을 공부한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 가지 않는 수치였다. 그러나 당시에 그 누구도 높은 성장수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고, 그저 ‘감탄’하는 소리밖에 듣지 못했다. 당연히 나도 ‘의문’은 가지만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리커창 총리로부터 나왔다. 이(李) 총리는 “중국의 10%가 넘는 GDP 성장 수치를 나는 믿지 못한다. 나는 나 나름대로 중국경제성장을 평가하는 수치가 있다. 그것은 ①전력소비량과 ②열차 화물수송량 그리고 ③은행 신규대출액이다. 이 세 가지는 과세 목적으로 확실한 수치이기 때문에 경제성장 속도를 측정할 수 있는 비교적 정확한 근거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많은 서양 사람들은 이 세 가지 지수를 『리커창 지수』라고 불렀다.
또 하나 의문이 가는 수치는 2022년도 중국 경제성장 속도다. 코로나로 주요 도시는 셧다운되었고, 무역량도 10% 이상 줄었다. 그러나 중국의 2022년 경제성장 속도는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 3.4%였다. 정말 신(神)의 조화다. 서울과 부산을 셧다운 시키고, 우리나라 수출량도 마이너스인데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플러스 3.4%라면 누가 믿겠는가? 과거 같으면 모르겠지만 이제는 중국 수치를 보면 그저 조용히 웃음만 나올 뿐이다.
시진핑은 끊임없이 공산당이 경제의 우선이라고 말하며, 국영기업의 비중은 늘리고, 민영기업의 비중은 낮추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바로 국진민퇴(國進民退)의 주장이다. 여기에 비해 리커창은 비효율적인 국영기업의 규모는 감축하여야 한다. 그 대신에 시장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개인기업의 비중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는 ‘시장규칙의 준수’를 역설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공무원들의 입장에서 시진핑의 “국영기업의 덩치를 늘리고, 당이 기업 경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감히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중국 내 큰 공장도 문을 닫고, 서민경제가 너무 어려워지자 리커창 총리는 하나의 대책을 발표하였다. 바로 『길거리 장사』의 허락이었다.
2020년 5월 이 총리는 “사찬(四川)성 성도(成都, 청두)시가 노점경제(地經濟)를 일으켜 하룻밤 사이에 10만 명의 일자리를 해결했다”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5월28일 신화사 통신은 “성도에는 임시 노점구역이 2,234개에 달하고 1만7,891개 노점상이 활동하고 있다”, “노점경제 덕분에 새로이 취직한 사람이 10만 명이 넘고, 다시 문을 여는 음식점은 98%에 달한다.”고 보도하였다. CCTV 에는 불야성을 이룬 성도 시 거리 모습이 소개되었으며 “성도 시는 코로나19 사태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불과 일주일 후인 6월4일부터 기류는 급반전하였다. 공산당 선전부는 ‘언론에서 노점경제라는 단어를 쓰지 말라.’고 지시하였고, 일부 매체는 노점경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시진핑의 직속부하가 시장인 북경 정부는 “노점상이 도로를 무단으로 점거하는 행위 등을 철저히 단속하고 엄중 처벌하겠다.”는 방침까지 발표하였다.
본인도 KBS에서 2년여 동안 북한경제에 관한 방송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강력하게 주장한 것 중 하나는 ‘장마당’을 재개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공산권과 같은 통제경제 하에서, 정부가 할 수 없는 ①생산성 향상과 ②계획경제의 부족한 면을 보완하는 ‘장마당’은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와 같은 자유경제에서 생각하는 ‘야시장’ 내지 ‘길거리 장사’와는 몇 단계나 차원이 다른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그리고 김일성 때도 장마당은 성행하였었다. 그러나 김정일 때부터 장마당은 금지되었다.
나의 권유 때문만은 물론 아니었겠지만 김정은은 ‘장마당’을 재개설하였고, 이를 통해 북한 주민들의 생활은 현저하게 개선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북한정부 내의 어떤 이유와 코로나 사태로 장마당은 폐쇄되었다. 북한주민들의 생필품 공급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가끔 탈북자들이 나오는 TV방송이나, 우리 자체 TV 방송에서 ‘장마당’ 관련 기사가 나올 때 마다 나는 남다른 감회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리커창 총리가 경제를 이끄는 동안 중국 경제는 탄탄하게 발전하는 추세였지만, 임기 말 ‘제로 코로나’ 정책 시기에는 많은 정책적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제로 코로나 정책이 경제에 가하는 압박이 너무 심하다’고 주장하였고, 관료들에게도 ‘규제가 성장을 망치지 않도록 하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제로 코로나 정책을 해제하기 전에도 대중 앞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나타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현실에서 시진핑 주석의 명령과 리 총리의 지시 중 하나를 선택하여야 만 한다면 리 총리의 명령은 실행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2019년 서안(西安) 삼성전자가 휴대폰 공장을 폐쇄할 때 매우 이례적으로 삼성공장을 방문하고, ‘품위 있는 퇴출이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민경제를 현장에서 챙기는 진정한 경제학도인 총리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여튼 이밖에도 리 총리의 정책에 대해 뒷목을 잡는 중국정부의 행동은 수없이 많았다.
2022년 10월 22일에 진행된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시진핑의 3연임이 결정된 회의) 폐막식 도중에 후진타오 전 중국 주석이 강제적으로 보이는 퇴장을 당하였다. 그는 자기 발표문을 빼앗기고 강제퇴장 당하였으며, 퇴장하면서 리커창의 등을 두드리며 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https://youtu.be/OIcVI2dyvK0)
제비 한 마리가 나는 것을 보고 “천하에 봄이 왔음을 안다.”는 말이 있다.
중국에서는 국무위원 이상(장관급)이 되면 아무리 죄를 지어도 조사를 받지 않는 것이 전통이다. 그러나 주석은 국무위원정도가 아니다. 그 보다 두단계나 높고, 중국 14억 인구 중에서 단 한명밖에 없는 직위다. 그런 후진타오가 발표도중에 발표 자료를 빼앗기고, 강제퇴장을 당한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할까? 그리고 퇴장 당하면서 후진타오는 리커창 총리의 등을 살짝 토닥거리며 나갔다. 아주 짧은 장면이지만 정말로 매우 의미 깊은 장면이다. 참고삼아 리커창은 후진타오가 공청단의 차기 후계자로 뽑은 사람이고, 단순한 후계자가 아니라 상호간에 지극한 신뢰감을 가지고 있는 사이라고 한다.
그런 리커창 총리가 지난 10월 27일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리커창의 마지막 모습은 불과 한 달 전인 9월, 돈황의 막고굴을 방문하여, 수행원과 함께 건강하게 계단을 올라가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었다. 갑자기 사망하기에는 너무 건강하지 않았는가하는 생각이 든다. 향년 68세의 나이다. 그리고 중국은 관례에 따라 상무위원 이상인 전, 현직 고위직은 개인별 전속 의사와 경호원이 24시간 동행한다.
가. 리커창 총리의 간단한 이력서
● 1955년 안휘성 출생
● 북경대학 졸업, 북경대학 학생회장
● 법학으로 학사, 경제학으로 석·박사 취득
● 1992년 불과 37세의 나이로 공청단의 제1서기, 차세대 리더가 됨
● 1999년 44살의 나이로 호남성, 중국 최연소 성장(城將)이 됨
● 10년 간 국무원 총리(2013년 3월~2023년 3월) 역임. 중국 거시 경제와 민생 정책을 총괄. 그러나 시진핑의 방해로 많은 역할은 못함
● 후진타오 전 주석에 의해 차차기 주석으로 인정
● 시진핑과는 달리 합리적 개혁가로서 실용적인 경제 정책과 성장에 의한 빈부 격차 해소, 저렴한 주택 공급 등 등소평의 경제정책과 유사한 경제정책 유지
● 2023년 3월 총리 고별사에서 "사람이 하는 일은 하늘이 보고 있다(人在做, 天在看)”라고 말함. 해당 영상은 중국 인터넷 검열 시스템인 ‘만리방화벽’에 의해 곧바로 차단. 이 글귀는 유비가 사망한 후 6번째 북벌을 앞두고 제갈량이 한 말임
● 또한 퇴임 전 리커창 총리는 시진핑 구릅에 속하지 않는 유일한 최고위급 인사였음
이 부분을 서술하는 데는 상당히 망설여지는 측면이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 동양의 예의는 돌아간 분에 대해서는 칭찬으로 끝내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에 관한 글이기 때문에 마음을 고쳐먹기로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가장 분연히 일어난 분은 ‘살생을 금기’하는 승려이신 서산대사 휴정과 유정, 영규 대사였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도 국가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거창한 인물도 글도 아니지만 내 마음이 망설여지는 것을 줄이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중국에게는 매우 안 된 일이고, 우리에게는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나는 얼마 전 다른 글에서 “내가 중국과 관련하여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리커창 총리가 최고위직에 오르는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이유를 이제는 자세히 설명하겠다.
나는 정치인들이나 사람을 평가할 때 몇 가지 중요한 판단 기준이 있다. 특히 정치인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첫째; 합당한 능력이 있는가?
; 나는 정치를 하고 싶은 사람 중에서 정말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솔직히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 라고 생각되었다.
둘째; 국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
; 즉 정치를 자기 입신의 기회 또는 자기 이익의 증진수단으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최소한 국민의 이익을 위해 자기에게 상당한 이익이 되는 것도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에 대한 질문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기준에서 ‘그렇지 않다.’ 라고 생각되었다.
셋째; 그런 능력과 마음을 가지면서도 윗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 우리 주위에는 능력도 있고 동시에 국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재야에 있거나 또는 권력과 먼 거리에 있는 것으로 생을 끝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권력의 위치가 높을수록, 자기 뜻을 펼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합당한 능력과 애민(愛民)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은 매우 드물다.
넷째; 특출한 능력과 애민정신을 가지면서도『최고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 있는가?
이것은 진심으로, 진심으로 드문 경우다. 시진핑, 스탈린, 모택동, 바이든 모두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최고위 직에 올랐다. 높은 능력이 있고, 애민정신이 있으면서 최고위에 오른 사람이라면 나는 워싱턴과 링컨, 테오도르 루스벨트와 손자 루스벨트 정도이고, 우리나라라면 세종과 태종 그리고 정조 대왕을 뽑고 싶다. 그러나 우리나라 임금님들은 선거직이 아니니 제외하여야 할 것이다. 선거에 의해 뽑힌 사람이라면 미국 대통령들 이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아마 이런 대통령들이 있었기에 식민지 국가였던 미국이 불과 250년 만에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리커창 총리가 두려운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였기 때문이다.
(1) 그는 북경대학을 거의 최우등으로 졸업하였고, 총학생회장으로서 리더십도 갖추었다.
(2) 불과 37세의 젊은 나이에 공산주의청년당의 최고 리더가 되었다.
(3) 44세의 젊은 나이에 안휘성 최고 책임자인 성장이 되었으며, 행정능력도 뛰어났다.
(4) 57세 젊은 나이에 14억 중국의 제2인자인 총리가 되어 10년간 통치하였다.
(5) 그리고 후진타오 주석에 의해 차차기 주석으로 지명되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권력의 암투에서 살아난 사람들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나 리커창 총리는
(6) 뛰어난 행정가이며 경제이론가였다. 그리고 안휘성 성장 시절과 초기 총리시절, 즉 시진핑이 아직 강력한 독재를 시행하기 이전, 그는 중국경제를 정말 잘 이끌었다. 그의 전반기 시절 중국 GDP는 거의 두배 가까이 성장하였다.
(7) 그는 매우 청렴한 사람이었다.
; 시진핑이 다른 권력자들을 몰아내는데 전가보도로 쓴 정책이 바로 암행조사를 통한 부정부패의 발견이었다. 리 총리도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총리직을 사임시킬 만한 부정부패가 없었다. 그래서 68세가 되어, 나이 정년에 따라 총리직을 물러날 때가 되어서야 물러나게 되었다.
(8) 그리고 그는 진심으로 애민정신(愛民精神)을 끝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의 경제정책은 합리적 개혁가로서 실용적인 경제 정책을 주장하였다. 빈부 격차 해소에 진심으로 노력하였고, 저렴한 주택 공급을 힘썼으며, 삼성이 휴대폰 공장을 폐쇄하자 거기까지 찾아와 다른 사업에 삼성이 추가 투자해 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었다.
(9)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두려웠던 것은 그가 후진타오에 의해 차차기 최고 지도자로 선임되었다는 사실이다.
1번부터 8번까지의 특성을 갖춘 사람이 14억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을 때 중국은 어떤 발전을 할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발전과 유사한 또는 그 이상의 발전도 얼마든지 가능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관계는 그리 순탄한 관계가 아니었다. 중국은 강성해지면 항상 우리를 침탈하였고, 그 횟수가 무려 500회 이상이었다고 한다. 중국은 본질적으로 영토 확장에 눈의 불을 킨 나라다.
지금도 쪼끔 자기나라가 나아지자마자 ‘동북공정’이라고 하며, 고구려도 자기 역사, 발해도 자기역사, 김치도 자기 것, 한복도 자기 것, 하다못해 손홍민의 손씨도 원래 중국 성씨이니 손홍민도 중국 사람이라고 한다.
이것이 중국이다. 국뽕도 좋고, 중국뽕도 좋다. 그러나 뭔가 진실된 중국의 속성을 알고 중국뽕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미 결론을 다 말한 것 같다. “중국에게는 매우 안 된 일이고, 우리에게는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사마천 사기의 『이사와 한비자』의 고사가 생각난다.
원래 이사와 한비자는 ‘순자’의 제자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진시황에게 한비자가 소개를 받았을 때 이사(李斯)는 이미 진나라의 승상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한비자의 능력을 잘 알고 있던 이사는 자기의 능력이 비자에 미치지 못함을 솔직히 인정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진시황에게 말하였다. “한비가 한 나라 사람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는 결국 고국인 한나라를 돕지 우리 진나라를 돕지 않을 것입니다. 그를 끝까지 중용하시지는 말고 꼭 붙잡아 두십시오. 그가 한나라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 진나라에 너무 큰 위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돌아가겠다면 죽이십시오. 그래야 한 나라가 진나라를 위협하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한비자는 이사에 의해 독살 당했다.
시진핑의 권좌(權座)는 내가 보기에는 상당히 견고하다고 본다. 우리 자유주의적 시각에서는 위험할지 몰라도 7억대의 카메라와 인터넷 은행 그리고 시진핑 인맥으로 둘러쳐진 중국을 보면 설령 “죽의 장막(Bamboo Curtain)” 시절로 돌아가는 수는 있을지라도, 물러나는 법은 거의 없을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내가 두려웠던 것은『모택동과 등소평의 관계』였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그리고 아무리 견고한 권력일지라도, 수장(首將)이 사라지면 그 권력은 와해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장구한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다.
그런데 그때, 즉 시진핑이 사망하였을 때 등소평처럼『리커창 총리가 돌아온다면...』이사와 한비자의 고사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리커창 총리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매우 죄송스럽지만 우리 대한민국, 국가적 입장에서는 솔직히 매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그렇다.
그러나 나의 개인적 입장에서는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나의 솔직한 두 가지 서로 다른 상반(相反)된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