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비샘 Jun 19. 2023

나혜석, 김만덕

목사가 봤던 여성학

먼저 필자는 양가의 할머니들과 어머니, 아내를 깊이 사랑하며 특히 외동딸을 너무 좋아하는 30대 남성이고, 부부동시 육아휴직 의무화와 더 많은 아동수당에 찬성함을 밝혀둔다. 


여성신학개론은 신학과 의무과목이었다. 몇 권의 페미니즘 책을 읽어야했고, 거기서 나혜석(1896-1948)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조선최초의 여성서양화가, 여성소설가. 조선 최초로 세계여행을 했던 여성.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일본에 유학을 가고 변호사와 결혼했으며 외국에서 체류기간이 길어 외국어에도 능통했다. 그녀가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쓰면 전국 어디서든 읽을 수 있었다. 



젊은 시절의 나혜석과 나혜석의 자화상. 자화상은 서양의 여인 같다. 사진출처 연합뉴스(좌), 동아일보(우)


필자는 건조하게 책을 읽어내려갔다. 외국에서 불륜을 저질렀고 결국 집에서 쫓겨났다는 단락을 읽을 때도 별 감상이 없었다. 그러나 아들이 보고 싶어 전남편 집을 기웃거렸다는, 또 가난에 시달려 집도 없이 떠돌다 건강을 잃고 행려병자로 사망했다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을 때는 마음이 시렸다. 




나혜석은 1세대 페미니스트 중 가장 유명한 존재이다. 하지만 어느 책이든 그녀의 생애에 대한 평가는 꺼리는 것 같았다. 그런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던 어느 날 거상 김만덕이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의녀 김만덕(1739-1812)은 제주에 태어나 12살에 고아가 되었다. 처음엔 친척집에서 지냈으나 이내 기생을 양성하는 교방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 만덕은 기녀가 되지 않았다. 당시는 조선의 농법이 변화하고 생산력이 높아지는 산업적 과도기였는데, 상재가 있었던 그녀는 그 변화를 읽어내고 장사를 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만덕의 나이 54세, 제주에는 심각한 기근이 들어 세 고을에서만 헤아려도 600명이 아사했다. 소식을 들을 정조가 구휼미를 보내지만 배가 침몰하였다. 그러자 만덕은 전재산을 풀어 육지에서 450석의 쌀을 사와 사람들을 1100명의 사람을 구원했다(조선에서 구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심청가의 공양미 300석은 2020년 시가로 약 1억이 조금 넘는다. 마침맞게도 심청전은 정조 때 작품화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300석으로 75칸(130평) 기와집으로 살 수 있었다. 만덕의 자선은 450석이었으니 적게는 1억 5천만원, 많게는 100평 아파트 2채를 기부한 것이다. 또한 1석은 성인남성이 1년간 먹는 쌀로, 450석은 900명이 반년, 1800명이 3개월간 먹을 수 있는 양이다.


감동한 정조는 그녀에게 벼슬을 내리고 서울로 초대했다. 만덕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단독으로 왕을 알현했다. 왕이 청하거든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고 하자 만덕은 “소원은 서울의 번화함과 금강산의 명승을 보는 것뿐”이라고 대답했다. 왕은 말을 내주었고, 여행로의 모든 고을에서 만덕을 대접하게 했다. 제주에 돌아갈 땐 선비들이 너도나도 글을 지어 그녀에게 바쳤다.


제주로 돌아온 뒤에도 장사를 계속했고, 혼인하지 않았지만 양아들을 들여 길렀다. 74세로 세상을 떠났고 양아들에게 약간의 유산을 남기고 나머지는 빈민들에게 베풀었다. 만덕할망의 묘비는 200년간 할망의 업적을 전하고 있고, 현재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할망의 묘탑은 크고 웅장하다. 




데칼코마니를 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아였다. 

(그녀는 부잣집 딸이었다.)


그녀는 과도기에 태어났다

(그녀도 과도기에 태어났다)


그녀는 유학을 떠났다

(그녀는 섬을 나가는 것을 금지당했다)


서양화를 배웠다

(기생의 그림을 배웠다)


결혼했으나 간통했고, 아들을 낳았으나 볼 수 없게 되었다

(혼인하지 않아 아들을 낳은 바 없으나, 양아들을 길렀다)


유럽과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서울로,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에서 돌아오자 집에서 버림받았다.

(여행에서 돌아와 사업을 계속했다.)


아버지와 남편이 없어진 그녀는 어쩔 줄을 몰랐다. 

(기근이 들자 사람들이 어쩔 줄을 몰랐다.)


그때 그녀는 말했다 "내가 남자였으면 영웅호색이라 했을 것이외다."

(그때 그녀는 말했다. "가서 쌀 좀 사 오너라")


분노를 담아 글을 썼다.

(칭송 가득한 글을 받았다.)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뜯어먹는 악마다.”라고 썼다.

(자신의 살을 내어 자식도 아닌 사람들을 먹였다)


그녀는 자녀들을 그리워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그리워했다.)


자식들은 그녀 만나기를 거부했다.

(임금이 그녀를 궁궐로 초대했다.)


세상을 원망했다

(세상을 구원했다)


그녀는 집이 없어 떠돌다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자기가 올린 집에서 마지막 끼니를 하고 세상을 떠났다)


신문에 무연고자 부고가 올랐다. 

(그녀의 묘비의 일부다. "비록 옛날의 현명한 여자라 하더라도 아직 이런 일은 없었다. 칠순에도 얼굴과 머리가 신선과 부처를 방불케 하였고 두 개의 눈동자가 빛나고 맑았다."**)




딸이 둘 중 한 명 닮기를 바란다면 그게 누구인지는 정해져 있다. 

혹시 만날지 모르는 미래의 아들에게도, 또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자녀들에게 남긴 시다. 


‘사남매 아해들아 /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

네 어미는 과도기에 태어나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느니라….’



반면, 그녀는 글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이런 대화가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 저희 아이 먹을 쌀만이라도 조금 꾸어주시면..."


"조금만 기다려, 내가 해결할게" 



의녀 김만덕의 묘비와 묘탑 [출처] 제주의 소리



*[대한민국 기획재정부 블로그], "심청이가 받은 공양미 300석의 현재 가치는 얼마일까?" 

https://naver.me/Gye0eiY6


**[디지털제주문화대전], "김만덕묘비" http://aks.ai/GC00700351




작가의 이전글 명상보다 확실한 100% 기분전환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