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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샘 Apr 29. 2021

천당지옥이 전부가 아니라니깐

현세적 구원과 검증가능성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하나님나라"란 기본적으로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지상에 도래하는 것이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구원은 기독교 용어가 맞긴 하다. 그러나 다른 종교도 예외 없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 힌두교에서는 카르마(업)을 잘 쌓아서 다시 인간으로, 또 더 높은 계급으로 윤회하는 것이 목표다. 그것이 힌두교의 구원이다. 불교에서는 집착할수록 고통스러우니 그걸 깨닫고 집착을 버리라가르친다. 이 해탈 불교의 목적이고 구원이다. 유교는 어진 정부를 만들고 백성들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교육해서, 전쟁도 가난도 없는 태평성대를 이루는 게 목적이다. 왕도정치를 통한 대동사회, 그것이 유교의 구원이다. 구원이란 종교차원에서는 그 종교의 목표·목적이며, 개인차원에서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괴로움, 배고픔, 굴욕이 바로 인문학의 시작이고, 그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한 사상가에게 제자들이 생겨 조직을 이루면 종교가 된다.


한편 표준국어대사전은 구원을 “1.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줌, 2. (기독교)인류를 죽음과 고통과 죄악에서 건져내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이렇게 구원의 사전적 정의와 각 종교의 사례들을 종합해 생각해보면 결국 종교란 세상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기독교의 구원을 이야기해보자면, 기독교 또한 삶의 괴로움에서 해방되는 것이 목표다.


기독교의 진단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타인의 이기심이 나를 상처 입히고, 내 이기심이 남을 상처 입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처방은 상처를 안 입히기로 약속한 사람들이 조직,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이 공동체를 교회라고 부르는데, 교회는 기독교인들이 이상세계로 여기는 “하나님나라”의 프로토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두 번째 진단은 때로 사람이 가난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해결방법은 굶거나 병들어 죽지 않도록 서로 돕기로 약속한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는 것, 또 이미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다. 이 상호부조와 빈곤퇴치 또한 교회의 핵심 기능이다.


에밀 되플러의 <발할라> 북유럽 세계관에서 명예로운 전사자들은 발할라로 인도되어 매일 잔치를 즐긴다. 기독교의 천당은 발할라와 같은 사후세계관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독교의 구원관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천당*과 지옥이라고 하는 개념이 훨씬 유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천당과 지옥이라는 “내세적 구원론”은 분명 기독교에 존재한다. 죽음이라고 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한계와 공포에 대해 희망적인 답을 주는 것은 종교의 고유한 역할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희생이 나의 죄를 없애준다는 교리를 믿으면 나는 죽어서 천당에 갈 수 있다라는 교리를 기독교의 유일한 구원론으로 알고 있는 것은 문제가 된다. 내세적 구원론은 현세의 고통에 대한 진단과 처방으로서는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은 검증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힌두교의 구원관도 합리적이지 않다. 힌두교가 진단하는 고통의 원인은 “전생의 악행”이다. 이는 경험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검증이 안 된다. 마찬가지로 해결방법은 “현생의 덕업”을 통한 다음 생에서의 신분상승인데, 이 또한 검증이 안 된다.  


반면 힌두교의 대안이었던 불교의 구원은 합리적이다. 고통의 원인이 자신의 집착이라는 명제는 개개인마다 나름대로 검증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그래 내 탐욕 때문에 나를 너무 피곤하게 몰아세웠어. 명상하고 베풀면서 행복하게 살아야지하며 불교를 따라서 실제로 행복해졌다고 하면 그건 하나의 사례보고가 된다.  한편 허튼소리! 지금 내 자식이 전쟁 나갔다가 죽어서 돌아왔는데 이게 내 집착 때문이냐!!”하는 사람은 불교를 안 믿으면 된다. 이 사람에게는 불교의 진단과 처방이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불교는 지적인 중산층에게 잘 먹히는 편인데, 여간 여기서 중요한 건 불교의 답이 맞냐 틀리냐가 아니라, 불교는 힌두교와 달리 현실분석에서 답을 찾았고 그 답의 결과를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종교의 진단과 처방이 합리적인지, 혹은 타계적인지 분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나라는 유토피아나 유교의 대동사회와 같은 이상사회론이다. 사진출처 - yes24

같은 기준으로 평가해볼 때, 유교의 구원관도 합리적이다. 어떤 유교국가가 생겨났다면 우리는 그걸 분석하고 평가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현세적 구원론(하나님나라)과 내세적 구원론(천당·지옥)이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에는 합리적이었다. 불교가 개인을, 유교가 국가를 해결의 열쇠라고 봤다면, 기독교는 자발적인 사람들의 공동체를 그 열쇠라고 봤다. 그러나 현세의 구원을 망각하고 사후세계만 강조되었을 때 타계적인 것이 되었다. 

 

2가지 차원에서 그러한데 첫 번째 차원은 내세적 구원관의 우선적 관심은 현생의 고통이 아니고, 미래에 지옥에 가게 될지 몰라 생기는 불안이라는 것이다. “천당과 지옥”이라는 사후세계관은 죽음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기에, 진단의 대상이 애초에 “현세의 고통”이 아니다. 두 번째 차원은 이 구원관으로 현세의 고통을 설명할 때 생기는 문제이다. 우선 진단이 아예 없다. 기본적으로 “모른다”이고, 때로 하나님의 뜻이라던가, 사람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는데 그 경우에는 신을 비도덕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된다. 한편 내세적 구원론의 고통에 대한 처방은 죽으면 천당에 갈 거야, 거기선 안 불행할 거야”이다. 이는 당장 아픈 사람에게 죽으면 안 아플 거라는 말과 같다. 그리고 사후에야 고통이 해소되는 이상, 힌두교의 윤회와 마찬가지로 검증이 불가능하다.


차라리 조용기 목사의 예수님 믿으면 영혼(마음)이 행복하고, 부자가 되고, 몸이 건강하다라는 삼박자 구원이 현세적이고 합리적이다. 이 처방이 타당하든 그렇지 않든, 일단 검증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마음이 행복하고 부자가 되고 몸도 건강해진다는 것이 실험적으로 검증된다면 누구라도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다닐 것이다.


결론은 이러하다. 기독교의 구원관이 처음에는 타계적 성격이 적은 불교, 유교와 가까운 것이었지만, 중세를 거치면서 힌두교와 가까운 것이 되었다. 따라서 원래 기독교의 진단과 처방이 무엇인지 상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독교가 제시했던 고통의 원인은 폭력과 가난이고, 처방은 비폭력적이고 상부상조하는 공동체이다. 그리고 이건 검증가능하다. 한 기독교 공동체가 신분과 상관없이 서로 존대하는지, 또 구성원 중 가난한 이를 구제하는지 확인하고, 그 결과로 실제로 고통이 줄어들었는지 알아보는 것은 경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천국과 천당은 혼용할 수 있지만, “하나님나라”와의 혼동을 막기 위해 천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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