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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샘 Sep 01. 2021

5분 만에 보는 지저스의 일생

4가지 DNA

지저스의 삶은 두 파트로 이루어진다. Part 1. 전도여행(1), Part 2. 마지막 1주일. 소년-청년기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기록이 없다. 복음서에서 기록한 지저스의 행적의 기간은 처형 직전의 1년(요한복음은 3년)인데 이 기간을 “공생애”라고 부른다.


공생애의 시작

세례 요한이라는 예언자의 제자였던 지저스.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수행하시다가 깨달음을 얻는다. "아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라는 어때야 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겠다!" 이때 나이 33세. 친한 동생들 12명을 데리고 전도여행, 하나님나라 운동을 시작한다.


Part 1. 전도여행(하나님나라 운동) 4가지 활동

1. 가르치기

2. 귀신축출(싸움)

3. 병 고치기

4. 밥 먹이기


지저스는 전도여행 기간 동안 4가지 활동을 한다. 가르쳤다는 것은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것을 민중들에게 설파했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라는 종교적 표현이 좀 낯설 수 있는데, 현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의식화, 조직화를 떠올리면 쉽다. 삶을 힘겹게 만드는 원인을 파악하고(의식화),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람들을 연대하게 하는 것이다(조직화). 이는 민주화운동, 독립운동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하는 방법이다. 민주화운동가들은 독재자를, 독립운동가들은 일제를 고통의 원인으로 분석했고(의식화), “같이 (민주화운동·독립운동) 하자!!”라고 제안했다(조직화).


귀신은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사회구조적 악, 거기서 이득을 보는 기득권층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복음서에서 귀신은 명확하게 유대교 엘리트와 로마제국의 군대이다. 처음 등장하는 귀신은 “유대교 회당”에서 마주하며(막 1:21-28), 거라사에서 만난 귀신은 자신을 “군대”(레기온)이라고 칭한다(막 5:1-20). 바로 이들이 지저스가 보았던 유대 민중들의 고통의 원인이었다. 귀신축출은 이들과 지저스의 대결과 승리, 귀신에게 지배당하던 약자들의 해방을 상징한다. 즉 귀신축출이 의미하는 것은 부당한 제도의 개선과 폭력의 제거를 위한 투쟁이다.


치병은 약하고 아프고 소외당한 사람의 심신을 치유하는 것이고, 급식은 생존과 안전의 보장이다. 이 둘은 은유가 덜하다. 이상적인 세계에서는 질병과 배고픔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지저스는 그것을 당장 실천했다.


Part 2. 마지막 1주일

일요일 - 반로마제국주의 시위(열병식 패러디)

월요일 - 성전에서 시위(좌판 뒤집기!!)

목요일 체포, 금요일 처형

일요일 부활, 대 기독교 시대 개막


그렇게 활동을 하다 보니 12명 말고도 따르는 사람이 많아졌다. 지저스는 그 사람들을 몰고 유대교 최대 명절인 유월절에 수도 예루살렘으로 온다. 그 무리는 120명 정도로 추정하는데 그 이상일 수도 있다.


그 주 일요일, 지저스는 이 무리를 데리고 반로마제국 시위를 했다. 지저스는 새끼 나귀를 타고 로마총독을 흉내 냈고, 무리는 총독을 따르는 군인들처럼 줄지어서 따라왔다. 로마군의 퍼레이드(열병식)를 패러디한 시위였다. 그리고 로마황제의 지배가 끝나고 하나님나라가 올 것이라는 구호를 외치며(“대한독립만세!”) 성안으로 들어왔다. 로마총독 빌라도는 저 청년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수의 성전 정화, 야코프 요르단스, 1650년경,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 중간부분 오른쪽의 붉은 겉옷을 입은 사람이 지저스. 매대를 뒤집고 있다. 사진출처 - 가톨릭 일꾼

다음날 월요일, 예수님은 제자들과 성전에 들어갔다. 성전에서는 신앙심과 세금을 빙자해 상당히 무거운 착취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저스는 성전 내 제물상과 환전상의 좌판을 뒤집어엎었다. 성전의 제사장들은 저 청년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틀 뒤, 지저스는 목요일 밤에 체포됐고 금요일에 처형당했다. 일요일이 되자 그의 제자들이 지저스가 부활했다면서 다시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제자들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잔뜩 늘어났다.

     

지저스는 가르치고, 싸우고, 치유하고, 먹였다. 그 벼락같은 1년의 마지막 1주일은 그 싸움의 절정이었다. 물론 처형은 분명한 패배와 죽음이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그것이 신의 뜻에 부합하는 삶이었고, 필요했던 고난이며,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고 평가했다. 가르치고, 싸우고, 치유하고, 먹이는 DNA를 잇는 사람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지저스의 DNA - 전태일, 장기려

평화시장의 감자탕집. 한 청년이 시다 여공들을 데리고 와 음식을 시켰다. 자신 것을 빼고. 주인 아주머니는 청년 몫의 그릇을 슬쩍 더 떠주었다. 하지만 청년은 밥을 이미 먹었다며 먹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그러려니 했다. 한데 나중에 들어보니 그때 청년은 끼니를 거른 상태였다고 한다. 시다들에겐 자긴 이미 밥 먹었다고 말하고서 데려왔는데 덥석 받아먹으면 무안할 테니 그랬다고.


전태일1948년에 태어났다. 가난 탓에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채 17살에 봉제노동자로 취업했다. 1968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된 그는 14시간 일한 뒤 밤새워가며 공부를 하고 동료들을 가르쳤다.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바보회”를 만들고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을 조사하고 근로기준법의 내용을 알리는 활동을 했다. 이 일이 사업주들에게 알려져 전태일은 해고되었다.


한동안 막노동을 했던 그는 다음 해 평화시장에 다시 돌아와 “삼동회”를 조직해 노동환경 조사하는 설문지를 돌리고, 노동청과 청와대에 진정서를 제출한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보내기도 했는데, 이 편지에서의 요구조건은 1일 10-12시간의 작업시간과 매주 일요일의 휴일이었다. 당시 14시간을 일하고 한 달 휴일이 2일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이 경향신문에 실려 사회적 주목을 받았고 삼동회는 노조결성을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이려고 했다. 하지만 행정기관과 사업주들의 조직적인 방해로 무산되었다.*

전태일 열사의 사진(왼쪽), 영화화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화형식 장면(오른쪽) 사진출처 - 동아일보(왼쪽), 네이버 영화(오른쪽)

고단한 싸움 끝에 차가운 세상의 벽에 부딪쳤을 때, 청년은 법전과 자신을 불태우기로 한다. 1970년 11월 13일, 그의 나이 23세. 그날 이후 대학생들이 노동자들과 만났고 노조가 결성되고 노동운동은 급물살을 탔다. 지저스가 BC와 AD를 나눴듯이, 대한민국의 일터는 전태일 이전과 이후로 구분되었다. 주에 이틀을 쉬는 것, 보건휴가와 육아휴직이 보장되는 것, 노동자들의 건강보호가 상식이 된 것. 한국의 노동자들은 전태일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세상을 떠난 전태일은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그 묘비에는 “기독청년 전태일”이라고 쓰여 있다.


장기려(1911-1995)는 사회사업가이자 의사이다. 당시 간 연구 및 수술의 일인자였고 김일성 종합대학의 교수였지만 월남하여 부산에 정착해 1951년 복음병원을 세운다. 그는 행려병자들을 무료로 진료했고 하루에 200명이 넘는 환자들을 돌봤다고 한다. 병원의 규모가 커지고 무료진료가 불가능해지자 1968년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 조합인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을 설립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의 모델이 된다.


장기려는 어려운 이들의 수술비를 사비로 대신 내주곤 했다. 또 병원비가 없어 퇴원을 못하던 환자를 뒷문으로 도망치게 해 주거나 영양실조에 걸린 환자를 위해 “닭 2마리 값을 주시오”하고 써준 처방전의 이야기는 교과서에 나온 적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장기려 박사의 사진. tvN 알쓸신잡 부산편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왼쪽), 중앙일보(오른쪽)

그는 청빈한 삶을 살았다.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고, 은퇴 후에도 부동산이나 여타 재산을 소유하지 않은 채 복음병원 옥상 관사에서 지냈다. 임종 시 남은 재산은 1천만 원이었는데 그것마저 간병인에게 남겼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모든 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은 선량한 부산 시민, 의사, 크리스천. 이곳에 잠들다.”** 성경엔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10:21)라는 구절이 나온다. 지저스경건한 부자에게 한 말인데 그 사람은 근심하며 떠나갔다. 그러나 장기려는 저 말을 실행했다.


네 가지 DNA

지저스는 고통스러운 현실과 그 해방에 대해 가르쳤다. 로마제국의 폭력과 유대교 엘리트들의 억압과 착취에 대항해 싸웠으며, 가난한 이들을 먹이고 치유했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배워 노동자들에게 알렸다. 자기 끼니를 걸러 여공들의 밥을 먹였고, 그의 대결 상대는 권위주의 정부와 노동자의 건강보다 돈을 우선하는 사업주들이었다. 장기려는 학교에선 의술을 가르치고, 성경 읽기 모임(부산모임)을 주도했다. 가난과 질병을 상대로 투쟁했고, 가난한 환자들을 치유했다.


이들은 성인, 성자들이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이런 장렬한 인생을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려고는 해야 한다. 이들이 보여준 모범은 한결같다. 배워 가르치고, 싸우고, 치유하고, 먹이는 것. 정도의 차이일 뿐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출세에 지장이 생길지라도 부당한 일을 거부하기, 자녀를 먼저 챙기고 나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부조리와 유혹 앞에서 명상하기***, 매주 매달 기부하기. 성자들은 역사에 길이 남아 존경받는다. 그러나 이들은 박수받길 원하지 않는다. 같이 해주길 원한다.



* 『전태일 평전』, 『두산백과』 등을 참고해 작성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전태일의 편지>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 홈페이지에서 원문을 볼 수 있다.

**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등을 참고해 작성했다.

*** 명상은 분노와 공포를 잠재워주고 판단력과 공감능력을 높여준다. "모은 두 손은 저항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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