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동네 도착하면 저녁 7시.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크로스핏 박스로 간다. 칠판에 적힌 WOD를 보면서 ‘오늘도 힘들겠다.’ 싶은데, 그래도 끝까지 한다. 바벨도 잡고, 철봉도 잡고, 땀은 샤워하듯 흐르고, 숨은 턱까지 차오른다. 그렇게 1시간 몸을 혹사시키고 나면 기분은 꽤 좋다. 오늘도 나를 넘겼다는 뿌듯함이 올라와서 “나 오늘도 멋지네!”하며 자기만족에 살짝 취한 채로 집에 돌아온다.
그런데 그 뿌듯함과 별개로 책은 잘 안 펼쳐진다. 운동하고 씻고 소파에 앉으면, 이상하게 손은 리모컨부터 찾는다. 거실 테이블엔 10페이지 읽고 덮어둔 <대온실 수리 보고서>가 나를 보는데, “미안, 오늘은 넷플릭스 먼저” 하고 넘겨버린다. 그렇게 넘길 때마다, 책도 나도 조금씩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부엌 식탁엔 한 달째 자리만 지키는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요리도 하지 않아 책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식탁 풍경이 참 내 스타일이다 싶으면서도, 이게 맞나 싶기도 하고. 침대 머리맡엔 그나마 많이 읽은 <기린의 날개>가 반쯤 열린 채 누워있다. 다들 나를 기다리는 것 같은데, 나는 오늘도 옥순이의 러브라인이 더 궁금하다. 한때는 가장 큰 위로였던 책들이, 이제는 부담스러운 숙제처럼 느껴지는 게 내가 변한 걸까, 아니면 그냥 조금 쉬어가는 걸까.
넷플릭스는 참 쉽다. 그냥 틀기만 하면 되니까. 아무것도 준비할 필요 없고, 머리 비우고 보기 딱 좋다. 보다가 졸면 “계속 보시겠어요?” 하고 챙겨주는 친절함까지.
책은 다르다. 페이지를 넘기려면 내 손이 움직여야 하고, 줄거리가 궁금해지려면 내가 먼저 집중해야 한다. 넷플릭스는 내 시간을 순식간에 삼키는데, 책은 내 시간을 천천히 요구한다. 퇴근 후 피곤한 몸엔 아무래도 전자가 편하다.
그렇다고 책을 싫어하게 된 건 아니다. 주말에 카페 가서 커피 옆에 두고 읽는 그 시간이 여전히 좋다. 한 시간 넘게 앉아 있어도 지루한 줄 모르겠고, 페이지를 넘길수록 마음이 채워지는 기분도 분명 있다.
그런데 평일엔 그게 참 어렵다. 회사에서 몸과 마음이 다 지친 채 퇴근하고, 운동으로 남은 체력을 다 쓴 날엔 머리를 더 쓰는 게 버겁다. 책을 읽는 것도 결국은 ‘머리 쓰는 일’이라서, 넷플릭스의 자극적인 편안함을 이기지 못한다.
책을 좋아하는 나도 있고, 넷플릭스에 기대는 나도 있다. 둘 다 내 모습이니까 굳이 한쪽을 미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책들도 언젠가 다시 손에 잡힐 날이 오겠지. 아직 책장이랑 식탁, 침대방에서 나를 기다리는 중이니까. 그 기다림이 너무 길어지지만 않기를, 그렇게 또 스스로를 달래며 오늘도 리모컨을 먼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