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와인 수업과 나.

소비뇽블랑이 마시고 싶은 여름 밤. - WSET LV.2 수업 후기

by Rr

와인을 좋아하게 된 건, 사실 사랑 때문이었다. 작년, 주말이면 S와 와인을 마셨다. S는 와인을 자주 마시는 사람이었고, 와인을 고르는 취향, 와인에 얽힌 이야기, 잔을 고르는 모습까지 자연스러웠다. 난 그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다. 와인은 마실 때마다 맛이 달랐고,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시간이 내겐 조용한 여유이자, 작은 설렘이었다.


S와 헤어진 후, 와인을 마실 기회도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S와는 끝난 사이기에, 그와 다시 만나고 싶은 감정은 아니다. 하지만 와인의 시간은 그리웠다. 꼭 누군가와 마셔야만 좋은 건 아니지만, 와인을 함께 즐기고 이야기 나눌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와인을 더 알고 싶었고, 혼자서도 좋은 와인을 고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말하자면, 난 ‘와인을 더 잘 마시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한 거다.


어느 날, 인스타그램 알고리즘 때문인지 와인 수업 광고가 자꾸 떴다. 그중 하나가 눈에 딱 들어왔다. ‘WSA와인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WSET Level 2 자격증 과정. 수강료는 111만 원. 솔직히 좀 비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왕 시작하는 거,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그만한 값어치는 하겠지 싶어서 등록했고, 체력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회사에서 아카데미까지 한 시간 거리. 항상 여섯시나 그 이전에 퇴근할 수 있는건 아니어서, 퇴근하자마자 지하철 타고 달려가도 수업은 7시 정각에 시작이라 거의 매번 지각이었다. 수업은 세 시간, 끝나면 밤 10시. 다시 집에 오면 11시 가까웠다. 씻고 정리하다 보면 하루가 끝났고, 피곤은 쌓여만 갔다. 체력도, 정신도 점점 말라가는 기분이었다.


와인을 더 맛있게 마시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시작한 수업이었는데, 이건 진짜… 아카데믹 그 자체였다. 한 병의 와인을 마시기 위해 외워야 할 게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품종, 산지, 기후, 양조 방식, 스타일, 테이스팅 표현까지. 마시기 전에 책부터 봐야 하는 느낌이랄까.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향을 맡고 맛을 보면서도 '이게 진짜 블랙커런트인가?' '산도는 중간인가, 중간 이상인가?' 헷갈리기만 했다. 점점 마시는 게 아니라 분석하게 됐고, 솔직히 초반엔 '내가 왜 이걸 시작했지?' 싶기도 했다. 그래도 한 번씩 정확히 구분해낸 순간들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이상하게 그게 또 짜릿했다.


신기하게도, 와인의 가격과 내가 좋아하는 맛은 항상 일치하지 않았다. 수업에서 진행한 테이스팅은 늘 블라인드였는데, 내가 마음속으로 매긴 ‘맛있는 순위’와, 수업이 끝난 뒤 공개된 와인의 이름이나 가격은 늘 달랐다. 비싼 와인이 덜 마음에 들 때도 있었고, 이름조차 처음 듣는 와인이 의외로 좋았던 적도 많았다.(그래도 확실히 난 샴페인이 프레세코 보다는 훨씬 맛있다.ㅠㅠ)


그 덕분에 그동안 와인샵에서 눈길조차 안 주던 와인들도 마셔보게 됐고, 한 병을 고를 때 생각하는 기준도 생겼다. 예전 같으면 ‘으음, 잘 모르겠당’ 하고 라벨 예쁜 걸 골랐겠지만, 이젠 품종이나 스타일 정도는 따져보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제 와인 마시러 가서 아는 척 좀 할 수 있다는 게 꽤 뿌듯하다. “우리 오늘 삼겹살 먹기로 했으니까, 피노누아가 어울릴거 같은데, 넌 어때?", "곱창엔 역시 말벡이지!" 같은 말도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니까.


이번 주말이 시험이라, 이번 주 내내 퇴근 후 운동 다녀온 뒤엔 계속 책을 펼쳤다. 공부도 하고, 테이스팅도 정리하고, 덕분에 챗GPT—아니, 피티의 도움을 아주 많이 받았다. 고마워, 피티야 :)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와인이 더 마시고 싶어졌고, 그만큼 와인을 ‘더 잘 마시고 싶다’는 마음도 강해졌다. 이 기세를 몰아 다음엔 WSET Level 3을 등록할까 고민도 된다. 레벨 3은 시험에 테이스팅도 포함되고, 더 어렵고, 업계 종사자들이 주로 듣는 과정이라고 들었다. 솔직히 또 등록하면, 힘들다고 푸념하며 아마 울면서 수업 들으러 다니겠지.


그래도 또 한단계 성장한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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