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 바, 뒷방이야기

첫 잔, 낯설지만 오래 남는.

by Rr

처음 뒷 방이라는 바에 들어간 날이 떠오른다. 혼자 소주를 마시는 건 왠지 처량해 보일 것 같지만, 영화나 드라마 속 여자주인공들은 바에 앉아 혼자 위스키나 칵테일을 마시는 것이 꽤나 멋져보이던데. 도시 여자라면 바에서 홀로 위스키를 홀짝여야 한다는 생각에 동네 위스키 바들을 아이폰 지도에 줄줄이 별표로 표시해 두었다. 줄줄이 쌓여가는 별들 속에서, ‘오늘은 가볼까?’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막상 그 문을 여는 데는 꽤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날은 유독 힘든 하루였다. 하기 싫은 업무들을 하고, 그 와중에 해당 월의 시간외 근무 시간이 19시간을 넘었다는 이유로 혼나기까지 했다.


“어휴, 나도 시간외 근무 안 하고 집에 빨리 가고 싶다고. 일 안 시켰으면 나도 안 했지.”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을 되뇌던 나는, 술이 간절했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이런 하소연을 늘어놓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결국 그날, 혼자 바에 들어가 보리라 결심했다.


“어서 오세요, 뒷 방입니다.”


문을 열자 은은한 차 향이 나를 감쌌다. 묘하게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원하시는 바 자리 비어 있는 곳 아무 데나 앉으셔도 됩니다. 위스키는 메뉴판에서 고르셔도 되고, 메뉴에 없는 것들도 있으니 문의 주세요. 칵테일도 원하시는 스타일 말씀하시면 만들어 드릴게요. 저희는 차로 만드는 칵테일이 가장 인기랍니다.”


바텐더의 말투는 따뜻하고 자연스러웠다. 혼자라서 괜히 이상하게 보일까 걱정했던 내 마음도 조금씩 느슨해졌다.


“차로 만드는 칵테일이요? 처음 들어보는데, 그게 뭐예요?”


“여기 향을 맡아볼 수 있는 차 샘플들이 있어요. 마음에 드는 향을 고르시고, 단맛이 좋은지 덜 단 게 좋은지 알려주시면 맞춰 드릴게요.”


그는 작은 병들을 꺼냈다. 대여섯 개쯤 맡아 본 뒤, 마음이 가장 편안해지는 향을 골라 그에게 건넸다.


“이걸로 만들어 주세요. 달게요.”


“네, 잠시만요.”


그는 커다란 얼음을 썰고, 이리저리 액체를 따르고, 섞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했다.


“주문하신 칵테일 나왔습니다.”


처음 마셔본 차 칵테일. 첫인상은 ‘향이 편안하다’ 였고, 그다음은 ‘맛이 없다’ 였다. 평소 베일리스 밀크처럼 달콤한 칵테일만 즐기던 내게는 꽤 낯선 맛이었다. 하지만 ‘이게 어른의 맛인가.‘하고 생각하며 몇 모금 더 마셨다.


“어떠세요?”


“와, 너무 맛있어요.”


정말로 맛있진 않았지만, 이상하게 그렇게 대답해야 할 것 같았다. 비록 입맛에 맞지 않았지만, 그 차 향은 기억에 오래도록 남았다. 편안했던 그 순간은 내게 작은 위로가 되었고, 그 뒤로도 힘들거나 외로운 날이면 뒷 방을 찾았다.


종종 바텐더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재미도 생겼다. 요즘 힘든 일은 없는지 묻거나, 새로 들어온 위스키를 추천받기도 했다.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단골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추천 받기도 하고, 같이 카드를 치기도 하며 또다른 재미도 느낀다.


사실, 바쁘다는 이유로 그곳에 가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다.그런데도 이상하게 그곳은 여전히 내겐 언제든 돌아가도 괜찮은 쉼터처럼 느껴진다. 지금도 문득 그 바를 떠올리면, 차 향이 조용히 코끝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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