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날, 나를 위로해준 닷사이23
닷사이 23을 산 지도 벌써 8개월. 사케는 오래 묵히는 술이 아니라는데, 나는 괜히 아껴뒀다. 닷사이 23 같은 건 원래 뚜껑 따자마자 마셔야 향이 산다고 하더라. 하지만 좋은 술이니까 좋은 날, 좋은 사람이랑 마시고 싶었다. 막연하게 다음 남자친구랑 마셔야지 했는데… 그 사이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어버렸다.
어제는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평범한 날. 퇴근길에 문득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돈을 버는 이유가 뭘까?’ 결론은 뻔했다. 사람은 일해야 하니까 일한다. 그래도 어차피 해야 한다면, 번 돈은 조금 편하게 써도 되는 거 아닐까. 마침 여자의 그날이라, 괜히 몸도 마음도 예민한 날이기도 했고. 그래서 홧김에 집에 오던 택시에서 참치회를 시키고, 집에 와 닷사이 23을 열었다.
뚜껑을 따자마자 달큰한 향이 올라왔다. 잘 익은 배 같기도 하고, 멜론 같기도 했다. 맑은 술인데 향은 의외로 화사했다. 귀여워서 좋아하는 리델 O잔에 따르니까 보기만 해도 예뻤다. 예쁜 김에 더 예쁘라고, 유튜브로 essential 채널을 틀었다. 커버 아트가 늘 예뻐서 좋아하는 채널인데, 그날은 특히 잔잔한 팝송이 방 안을 채웠다. 배달 참치는 큰 기대 없었는데 의외로 곱고 기름졌다. 한 점 입에 넣고 닷사이를 한 모금 삼키니… 순간, 예민하게 곤두서 있던 마음이 멈췄다. 향이 입안에서 퍼졌다가 목 끝에서 싹 정리되는 그 느낌. 하루에 쌓였던 먼지가 잠깐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술 한 모금, 참치 한 점. 그렇게 마시고 먹다 술잔을 내려놓고 보니 방 안에 음악이 잔잔히 흘러나오고, 멜론 같은 향이 공기 사이에 가볍게 떠 있었다. 병에는 술이 절반쯤 남아 있었고, 나는 멍하니 잔만 바라보다가 웃음이 났다. 매일 이렇게 살 수는 없겠지. 좋은 술은 분명 좋은 사람과 함께라면 더 좋을 거다.
하지만 혼자여서 가능한 순간도 있는 거다. 닷사이 23은 결국 특별한 날을 기다리다 열린 게 아니라, 평범한 하루의 나를 위로해준 술이었다.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좋은 시간은 내가 만들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