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서쪽, 국경의 남쪽

by 백아절현

인간은 결핍 그 자체인 존재이다. 채워진 공간보다 빈 공간이 더 많은 존재이다. 어린시절 형성된 결핍과 상실이 정체성이 되어버리고, 그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해 일평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그 결핍을 채워줄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닌다.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인간을 방황하게 하고, 종국에는 그 방황이 주변마저 파괴시킨다.


이 소설의 주인공 하지메는 외동아들이라는 가정환경에서 오는 결핍에 둘러쌓여 자란다. 무의식 속에서 자라나는 고립감은 그를 외롭게 만들고, 상실감을 느끼게 한다. 와중에 외동딸인 시마모토를 만난다. 같은 결핍과 상실을 가진 친구이다. 서로의 '무언가'가 채워지는 흡인력을 느꼈지만, 아직은 어렸다. 이사를 가게 되고, 만남이 지속되진 못했다. 이후 하지메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만남을 반복하고, 만났던 여자는 회복불능의 상처를 받게 된다.


“그것은 나라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악을 행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결핍에서 비롯된 충동은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고, 결국 '악'이라고 할 수 있는 행동까지 자행하게 된다. 인간은 필요에 따라 제멋대로일 수 있고, 잔혹해질 수 있다.


텅 빈 20대를 보낸 하지메는 본인에게 편안함을 주는 유키코와 결혼한다. 그리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던 중에, 어린 시절 본인의 쌍둥이와 같던, 그 '무언가'를 채워줬던 시마모토를 다시 재회하게된다. 시마모토는 하지메의 판타지이자 이데아(Idea)이다. 어린시절 본인을 완성시켜주던 그 '무언가'이다. 하지메는 시마모토와 있으면 완벽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 하지메는 시마모토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미래를 약속하지만, 다음날 아침 시마모토는 사라져있다. 그리고 현재의 부인 유키코에게 솔직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게 된다.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늘 어떻게든 다른 인간이 되려고 했던 것 같아. 나는 늘 어딘가 새로운 장소에 가서, 새로운 생활을 하곤 했어. 거기에서 새로운 인격을 갖추려 했다고 생각해. 나는 이제까지 몇 번이나 그러기를 되풀이했왔어.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성장이었고, 어떤 의미로는 인격의 가면을 교환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지. 하지만 어쨌든 나는 또 다른 내가 되는 것으로서 이제까지 내가 안고 있던 무언가로부터 해방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거야. 나는 정말로 진지하게 그러길 원했고, 노력만 한다면 언젠가는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어. 하지만 결국 나는 어디에도 다다를 수 없었던거 같아. 나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일 수밖에 없었어. 내가 안고 있던 뭔가 빠지고 모자란 결핍은 어디까지나 변함없이 똑같은 결핍일 뿐이었지.”


하지메는 본인의 결핍을 털어놓고, 결핍을 채우기 위해 살아왔던 지난 날을 이야기하고, 결국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나는 어디에도 다다를 수 없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일 수밖에 없었어. 내가 안고 있던 뭔가 빠지고 모자란 결핍은 어디까지나 변함없이 똑같은 결핍일 뿐이었지"라며 하지메는 결핍을 받아들인다. 판타지와 이데아를 쫓던 하지메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방황을 멈추고 싶어한다.


“자격 같은 건 잊어. 그 누구에게도 자격 같은 건 없을테니까 (중략) 자격이라는 건 당신이 앞으로 만들어가는 거야. 혹은 우리가.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부족했는지도 몰라. 우리는 지금까지 함께 많은 것을 만들어온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아마도 여러 가지 일들이 너무나도 순조로웠던거야. 아마도 우리는 너무나도 행복했던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중략) 당신은 언젠가 또다시 내게 상처를 줄지도 몰라. 그 때 내가 어떻게 될지 그것 역시 난 몰라. 어쩌면 이번에는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게 될지도 모르지. 뭔가를 약속한다는 건 아무도 할 수 없는 거야. 나도 할 수 없고 당신도 할 수 없어. 하지만 나는 당신을 좋아해. 그뿐이야.”



유키코는 하지메에게 다시 시작하자고 한다. 유키코는 하지메가 10대 때 만났던 여자와는 달랐다. 똑같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지만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으려하는 인간이었다. 환상은 더 이상 자신을 구해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하지메도 약속한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새로운 하루를 함께 시작해보기로.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다. 다양한 사랑의 모양 중에, 가장 보편적인 생김새가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자신에게 부족한 면이 상대방에게 있으면 큰 이끌림을 느끼고,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러한 호기심에서 시작해서 부족한 점을 메워주며 시작한다. 그런 상호보완적인 사랑을 꿈꾸지만, 톱니바퀴처럼 완벽히 일치해서 빈 공간을 채워준다는 환상을 가지면 불행은 시작된다. '완벽'한 합치는 없다. 완벽이란 '12살짜리 외동'이라는 가정환경에서 비롯되는 고독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낸 어린 아이의 낭만적인 환상에 불과하다. 태양은 서쪽에서 진다. 어둠과 죽음의 이미지를 연상케 하지만 소설 말미에 하지메는 끊임없이, 태양의 서쪽을 이야기한다. 국경의 남쪽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죽음과 고독이 드리운 곳을 꿈꾸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죽음은 하지메에게는 재탄생의 느낌이다. 시마모토와 함께하는 유아적인 낭만적 경이(국겅의 남쪽)에 빠진 그에게 종말을 선사한 후, 새로운 탄생(유키코와의 현실)을 제시해주는 것 같다.


하지메를 보며 나 자신의 모습이 참 많이 보였다. 부끄럽지만 하지메가 느끼는 결핍과 고독, 상실감을 나도 살면서 적지 않게 느껴왔다. 그 공허를 견디지 못해 방황도 했으며, 나의 결핍이 싫어 나 자신을 책망하기도 했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커질 때는 거울에 침을 뱉어본 적도 있으니 말이다. 유난스러운 감성과 변덕 때문에 주변에 상처를 주기도 하고, 참을 수 없는 충동은 나를 갉아먹었다. 어찌보면 책과 비슷한 결론을 내린 듯한데, 결핍과 고독이 극복해야할 대상이 아닌, 나와 함께 공존해야할 놈들이라 인식한 뒤로는, 마음의 소용돌이가 가라앉았다.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메의 행태를 제 3의 눈으로 보았을 때,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도 누군가에게 하지메였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하루키 책은 3권째 읽어본다. 두껍지만 잘 읽힌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꽤나 중2병스럽지만 애착이 간다. 하루키 책의 주인공들과 직접 대면해서 이야기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했다. 하나같이 비슷하다. 사회적인 규율과는 한 발 떨어져 본인만의 확고한 기준이 있고, 생각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고 책을 좋아하며, 말수가 적다. 현실에서 이런 친구를 만난다면 친해지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말이 없고, 생각을 드러내지 않으니까 이 친구가 어떤 인간인지 파악이 안되기 때문이다. 소설이 아니라면 이 친구의 생각을 이렇게 깊게 들여다볼 기회 자체가 없을테니 말이다.


여러모로 유익한 책이었다. 재미도 있었고, 생각할 거리도 있었고,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해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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