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김승옥

by 백아절현

안개에 둘러쌓인 무진이란 도시는 어린시절 할머니 집에서 숨곤 했던 어두운 벽장같다. 아직은 집 밖의 세상이 흐릿했던 시절에, 당시 세상의 전부였던 그 공간에서 잠시나마 거리를 둘 수 있었던 곳이다. 처음에는 낯선 어둠에 조바심이 나지만 금세 적응하면 회색빛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진다. 몸은 잔뜩 웅크려야했고, 두터운 옷가지들에 파묻힌 채 나만의 작은 세상을 마주했다. 몇 분이 멀다하고 불안은 엄습한다. 하지만 매 불안 사이에는 왠지 모를 평안과 안온이 쉼표처럼 끼어들었다. 그 야릇한 안도감에 취해, 지칠 때면 그 벽장에 기어들어가곤 했다. 안개 속을 걷듯, 벽장 속을 몸부림쳤고, 남몰래 사랑도 했다. 그리고 누가 볼까 두려워 몰래 적은 편지를 찢어버렸다. 그렇게 안개 속의 무진은, 어둠 속의 벽장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사랑은 아득하게 멀어져갈테지만, 또 어느샌가 내 삶은 무진을, 아니 벽장 속을, 아니 억지로 삼킨 사랑을 맴돌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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