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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Mar 05. 2024

한 해의 출발선에 서서

우수의 끄트머리, 봄 맞을 준비는 되었습니다

봄보다 먼저 피는 영춘화

동쪽으로는 높은 아파트 단지, 서쪽으로는 오목조목한 단독주택들, 남쪽으로는 조금 멀리 쇠백로가 날아드는 논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아직 어떤 건물이 들어설지 모르는 덕분에, 집 없는 고양이들의 편안한 쉼터가 되고 있는 나대지가 있습니다. 그 사이 작은 사거리. 시속 30킬로미터 이상으로 과속하는 운전자들을 스물네 시간 감시하는 불빛이 반짝이는 모퉁이 집. 봄은 언제나 그 집 담벼락에서 가장 먼저 꽃핍니다.


'노란 건 개나리요, 분홍은 진달래'라고 세뇌되듯 배웠기에 사람들은 "어머, 벌써 개나리가 피었네?"라고 말하며 지나갑니다. 하지만 그 집에 사는 저는 압니다. 그 꽃은 개나리가 아니고 영춘화라는 것을요.

'봄맞이'라는 이름의 하얀 들꽃은 이름과는 달리 개불알풀, 꽃다지 등 다른 풀꽃들이 피고 질 때가 되어야 비로소 한들한들 피어납니다. 우리 동네 봄맞이는 앞차가 늦게 가도 경적을 울리지 않는 이 동네 사람들을 닮은 걸까요? 그렇지만 영춘화는 그 이름대로 봄보다 일찍 피어 봄을 맞이합니다.


엊그제는 밤에 눈과 비가 섞여 내렸습니다. 우수 절기에 내리는 것은 눈이라도 차갑지 않고, 비라도 억세지 않습니다. 얼음을 품고 있던 흙은 땅으로 다가오는 햇살에 녹아 허물어져 흙 속의 생명들이 꼬물거릴 틈을 주었습니다.


'입춘'에는 현관에 입춘축을 붙이고 복을 빕니다. 아이들에게는 봄천사가 봄 가루를 뿌려주고 간다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꼬불거리는 글자들은 매서운 찬바람을 불게 하는 동장군을 물러가게 할 거라고, 동장군이 샘을 부려 꽃샘추위가 올 수는 있지만 곧 봄은 온다고요. 아이들에게는 입춘이면 봄이야,라고 말하지만 저는 경칩이 되어야 비로소 봄을 느끼니, 제가 너무 둔감한 걸까요?


입춘과 경칩 사이, 우수라는 절기는 봄 맞을 준비를 하는 때입니다. 아이들은 새 학년에 올라갈 준비를 하고, 저는 소금물 속에 메주를 넣고 된장을 담갔습니다. 산에 갔더니 딱따구리도 집을 구하러 다니느라 분주하더군요. 지금은 이삿철에 부동산 중개소 찾아다니듯 이 나무 저 나무 겉껍질 떼어보며 옮겨다니네요.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하게 되면 따그르르르, 따그르르르 둥지 짓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지겠지요.


문구점에 들러 일 년 동안 그림을 그릴 작은 드로잉북을 샀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의 눈에 보이는 대로 한 장 한 장 그림을 그리며 절기를 살아갈 거예요. 저는 저대로 아이들과 어떤 글을 쓸까, 어떤 책을 읽을까, 어떤 그림을 그릴까, 어떤 노래를 부를까 얼개를 짰습니다. 이제 준비를 마쳤으니, 호각소리가 들리면 출발하겠습니다. 호각은 경칩에 깨어난다는 곤충들, 개구리들이 불어줄 거예요.


[또 하나의 달력/ 전례력]

해마다 차이가 있지만 '재의 수요일'로 시작되는 사순절은 주로 우수 절기에 시작된다. 겨우내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봄 맞을 준비를 하듯이, 내면은 깊은 성찰의 시간을 맞는다. 익숙함에서 벗어나고, 가던 길을 돌이키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시기 수태를 한 고양이들은 부활절 즈음에 새끼를 낳았다.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가는 문지방에 선 것처럼 출발선에 서 있는 시기다.


안개로 하늘이 뿌얘서 맨눈으로 뜨는 해를 본다. 흐리다고 세상만사가 다 안 보이는 게 아니다. 빨간 불이 켜져 잠시 멈췄지만, 신호등이 바뀌듯 곧 초록초록한 세상이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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