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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Mar 12. 2024

흙이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경칩은 사랑의 절기, 암수 다정히 노닐어 아름다워라

흙이 폭신폭신해졌습니다. 농부가 아닌 저는 발 밑에 들꽃이 피었나, 나무에 꽃망울이 터졌나 뒷짐 지고 설렁설렁 산길을 오르며 봄날을 마주합니다. 그러나 산기슭 손바닥만 한 땅뙈기에 뭐라도 심는 농부들은 어느새 삽과 곡괭이를 들고 바지런히 흙을 어루만지고 있으니, 한량 같은 제 발걸음이 사뭇 부끄러워집니다다음 절기를 여는 주인공 씨감자는 무대 위에 오를 날을 기다리며 밭 두둑이 두둑하게 올라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겠지요.


경칩에 흙일을 하면 탈이 없다는 말이 있어요. 그래서 예부터 경칩에는 흙벽이나 흙담을 새로 쌓았다고 합니다. [절기서당](김동철, 송혜경/북드라망)에 따르면, "경칩이 묘월 즉 목의 기운이 생동하는 시기라, 넘치는 목기를 제어하기 위해 흙의 기운을 빌린 것"(42쪽)이라고 해요.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해석한 것이기는 하지만, 다음 쪽에는 이런 구절이 이어집니다. "... 오행의 이치를 떠나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겨우내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던 흙은 갑자기 기온이 오르면 부슬부슬해지면서 응집력을 잃게 된다. 그러니 흙으로 만든 벽이며 담이 허물어질 수밖에. 이것이 경칩에 흙을 새로 바르게 되는 이치"(43쪽)라고요. 제게는 알쏭달쏭한 오행의 이치보다도 후자의 설명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리네요.


또 다른 달력을 보니, 3월 11일 아래에 '흙의 날'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아니, 언제 이런 날이 생겼답니까? '토요일'을 '흙의 날'이라고 멋들어지게 풀어쓴 것은 봤어도, 흙이 일 년 중 하루를 자기의 날로 접수한 줄은 여태껏 몰랐습니다. 유래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농촌진흥청이 2015년에 처음 지정한 날이라고 하네요. 3월 11일로 정한 의미도 나름 의미심장한데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네이버 지식백과를 찾아보시길.


어떻든 경칩은 얼음의 힘에 옥죄어 옴짝달싹 못하던 흙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절기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해님이 빛으로 얼음을 녹여 물이 흐르게 하면 흙도 덩달아 흐릅니다. 아니, 어쩌면 흙은 원래 더 큰 원을 그리며 흐르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흙으로 빚어진 모든 생명체는 삶과 죽음, 탄생과 소멸이라는 레일 위를 꾸준히 순환하며 흘러왔으니까요. 흙, 하고 발음하면 흐르던 뭔가가 입 안에서 딱 멈춰 서는 느낌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흙과 흐르다, 두 단어는 하나의 뿌리를 고 있었을 것 같아요.


경칩은 흙의 절기지만 사랑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처녀 총각은 살랑살랑 봄바람에 눈이 맞지요. 사랑하는 남녀가 경칩에 암수 모양이 다른 은행나무 씨앗을 나눠 먹었다는 풍습은 또 얼마나 로맨틱한지요. 공룡시대부터 있었다는 은행나무의 유구한 생명력만 보더라도 오래도록 사랑하겠다는 다짐을 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나무가 아니겠어요? 그에 비하면 한 달 전에 받은 초콜릿의 빚을 사탕으로 되돌려 주는 국적 없는 '하얀 날'의 고백은 가볍디가벼워 보입니다.

사랑이 시작되는 계절. 꼭 암수가 아니어도, 부부가 아니어도 사랑은 세상에 생명력을 불러옵니다.
같은 매화라도 저는 청매화 향이 가장 깊고 그윽한 것 같아요. 드디어 하나 둘 피어나네요.

흙이 흐르고, 사랑도 다시 흐릅니다. 올 한 해 논농사도 밭농사도 바다농사도 사람농사도 다 잘 되면 좋겠습니다.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고, 어긋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고, 가야 할 제 길 따라 두루두루 잘 흘러가는 날들이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의 달력/ 전례력]

경칩 절기는 사순절과 꼭 맞물린다. 사순절은 죽음과 생명을 묵상하는 시기. 절기달력과 전례력이 하나의 몸처럼 같이 돌아간다. 흙을 묵상하던 이번 절기에 평생 존경해 오던 선생수녀님이 흙으로 돌아가셨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아도 흙 속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그분과 나는 또 다른 영적인 네트워크 안에서 만나게 되었다.

재의 수요일,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라고 묵상하지만, 문득 이 전례 말씀에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음을 알았다. "흙에서 왔으니 흙과 함께, 흙처럼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라"라고 해야 한다. 태어나고 죽는 것뿐 아니라, 오늘 하루 사는 중에도 내가 흙과 함께, 흙처럼 살아야 하는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흙이니까. 그게 사람 도리를 다하고 사는 걸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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