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는 5학년 아이들과 했던 절기살이를 올해는 3학년들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아서일까요? 신어보고 샀지만 아직 발 모양대로 자리가 잡히지 않은 새 신발처럼, 아이들도 저도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발걸음으로 첫 절기를 맞이합니다.
밖에 나가기 전에 아이들에게 경칩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연인끼리 은행을 나눠 먹었다는 이야기, 새로 흙 벽을 바르고 밭일을 시작한다는 이야기. 그림책을 읽어줄 때 이야기를 보태면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는 더 또롱또롱해집니다.
"공책에는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을 찾아서 그리고, 느낀 점을 간단히 쓰면 돼."
아이들이 자주 가는 천변을 따라 걸어갑니다. 먼저 관찰할 거리를 찾아 글을 쓰고 나서 놀이터에서놀기로 했습니다. 땅에 달라붙어 겨울을 나느라 검보랏빛을 띠는 로제트 잎들, 햇살이 잘 드는 양지에 핀 개불알풀을 잘도 찾아냅니다. 여린 쑥을 한 잎 뜯는 아이도 있고, 새로 돋은 민들레 잎사귀를 한 장 뜯어 손에 쥐고 갑니다. 그런데 놀이터로 가는 계단에 올라가니 크리스마스 트리에 불이 켜진 것처럼 환하네요. 매화나무에 꽃이 활짝 피었어요!
손에 쥐고 있던 개불알풀, 쑥은 날려 버렸습니다. 다들 나무 근처에 모여들어 강아지처럼 킁킁대며 꽃향기를 맡아봅니다. 나도 꽃향기를 맡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진짜 큰일이네. 꿀벌이 없어."
매화꽃이 피면 꽃송이 하나에 꿀벌 하나라고 해도 될 만큼 웅웅거리던 꿀벌이 작년부터 보이지 않습니다.
"왜 큰일이에요?"
아는 것이 많아 '안다 권박사'라는 애칭이 붙은 녀석이 제 말을 대신 해설해 줍니다.
"꿀벌이 없어지면 세상이 망하는 거랬어."
"왜?"
"음, 꿀벌이 그러니까 음.. 열매를 못 맺게 하는데 열매가 안 나니까 세상이..."
세상이 망하는 게, 열매가 안 맺히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는 모를 테지만, 친구가 해준 이야기가 아이들의 머리에 깊이 남았나 봅니다.
매화를 그리고 꿀벌이 없어 아쉬웠다고 씁니다. 아직 꽃이 다 피지 않은 봉오리를 그린 아이는 꽃들 중에 가장 어려 보인다고도 합니다. 꽃송이를 자세히 들여다본 아이는 꽃 안에 또 꽃이 들어 있는 것 같다고 씁니다. 처음에 선택한 민들레 잎을 그리며 '봄의 트리'라고도 합니다.
여섯 명의 아이들 중에 다섯 명이 매화를 선택했네요. 하지만 민들레 잎을 '봄의 트리'라고 표현한 아이도 있어요.
5학년 아이들의 눈에 비친, 2023년 경칩 절기 풍경입니다. 3학년이나 5학년이나 아이들에게 봄을 알려주는 전령은 비슷해 보이네요. 작디작은 꽃!
아이들이 매화에 빠져 있는 동안 저는 진달래도 보았습니다. 제가 산책하는 뒷산에는 아직 피지 않은 진달래꽃이 놀이터 입구에 딱, 한 송이 피어 있네요. 그러나 다음 절기가 되면 놀이터도, 뒷산도 연분홍 빛이 가득 채워지겠지요. 6학년 아이들의 시첩(詩帖)에는 소월의 <진달래꽃>을 쓰자고 할 거예요. 그렇지만 진달래가 매화에 빠진 3학년 아이들의 화첩(畵帖) 주인공으로도 등장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가장 먼저 고개를 내민 아기 진달래가 서운해할까 봐대문 모델로 올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