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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Mar 26. 2024

인생도, 꽃생도 피고 지고

춘분, 필 자리를 위해 진 자리를 치우자

딸인지 며느린지, 바람과 함께 치마를 펄럭이며 왔던 영등할매가 지나갔습니다.

부지런히 걷다 보면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게 따스하다가도, 밤이 되면 세탁해서 넣어 둔 겨울 이불을 다시 꺼내고 싶어집니다.

날씨를 종잡을 수 없다고 투덜거리게 하는 꽃샘추위가 두어 차례 다녀가는 동안 어느새 낮밤의 길이가 같아졌습니다. 춘분입니다.


살다 보니 세상이 불공평하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심보가 고약하고 남에게 사기 치는 사람은 떵떵거리며 살고, 착하고 유능한 사람이 고통받으며 사는 걸 볼 때. 나는 재능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공부 잘하는 친구가 집도 부자고 예체능도 뛰어나고 성격까지 좋을 때. 죄 없는 어린아이들이 불치병을 겪을 때. 불공평한 세상에 화가 나면 제 눈에는 핏발이 서고, 발걸음은 절뚝거렸습니다.


그래서 필요했나 봅니다. 생명을 얻어 태어난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 것들이요. 그중에서도 일 년에 두 번, 낮과 밤의 길이조차 똑같이 배분된 공평한 날이 춘분과 추분이라지요.


경칩에 한 송이 피었던 진달래꽃이 산에도 피어나 산빛에 파스텔 빛이 감돕니다. 발 밑에는 개불알풀꽃이 한껏 피었고, 매화꽃도 산수유꽃도 목련도 살구꽃도 앵두꽃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었습니다. 와글와글 꽃 피는 소리를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절기입니다. 공원 울타리 안에 심은 명자나무도 꽃망울이 붉고, 밤 나들이를 재촉하는 벚꽃도 곧 필 겝니다.

잘 졌던 나무에 꽃들이 피었습니다. 이 꽃들이 진 자리엔 열매가 필 겁니다. 열매가 진 자리에는 꽃 필 준비가 시작되겠죠. 피고지고 피고지고, 반씩 공평한 것이 인생이고 꽃생!

이 꽃은 언제부터 피기 시작한 걸까, 언제까지 꽃이 피어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꽃은 피거나 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하루가 낮이나 밤이나 둘 중 하나이듯이요. 낮밤의 길이조차 공평하게 만드신 하느님은 꽃생에도 피는 기간, 지는 기간을 차별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꽃잎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피어 있지 않은 게 아니고, 꽃잎이 떨어져 눈에서 사라졌다고 지는 게 아닐 거예요. 꽃은 피는 게 반, 지는 게 반. 한치의 기울어짐도 없는 공평한 삶을 살고 있으니, 피어 반가운 마음을 질 때도 꼭 보여주자고 마음먹습니다.


꽃 진 자리에는 열매가 오겠지요. 진 자리를 잘 치워야 필 곳이 생깁니다. 적폐를 치워 버려야 새 세상이 올 수 있는 것처럼요. 꺾이고 부러지고 상한 가지는 과감히 쳐내야 싱싱한 새 가지가 쭉쭉 뻗어 오르듯, 마음에 묵은 때를 벗겨 내야 새로운 생명이 돋아납니다.


숲길을 걷다 보면 새들이 쪼는 바람에 썩은 나뭇가지들이 무심히 툭 떨어지곤 합니다. 보이지 않는 벌레들도 진 자리를 열심히 치워주고 있겠지요. 아파트에 심긴 나무들은 부지런한 경비 할아버지의 손길 덕분에 단정하게 이발을 하고 새 꽃을, 새 순을, 새 가지를 준비합니다.


춘분부터 추분까지, 하루가 다르게 길어지는 낮의 삶을 우리는 청춘이라고 부릅니다. 달려오는 청춘들이 원 없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빗자루를 들고 주변 정리를 깔끔하게 도와주는 사람. 진 자리를 차지하지 말고 말끔히 물러나는 사람. 꽃은 지더라도 사라지지 않음을 믿는 사람. 이런 노년의 자아상을 다시 되새겨 보기에 매우 적절한 절기, 춘분입니다.


[또 하나의 달력 / 전례력]

어느 해든 12월 25일인 성탄절과 달리 부활주일은 해마다 날짜가 바뀐다. 날짜가 정해져 있는 성탄은 요일이 바뀌지만, 부활절은 언제나 일요일이다. 예전에는 부활절이 어떻게 정해지는지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부활절이 춘분을 기준 삼아 정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어찌나 신기하던지! 춘분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만 의미 있는 절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 년에 두 번뿐인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 더욱이 춘분은 이 날 이후 낮의 길이가 길어진다니 새 출발과 희망의 첫 날로 삼기에는 알맞춤한 날이 아닌가. 교회에서도 부활절을 맞기 위한 준비는 분주하다. 교우들이 모여 성당 대청소를 하고, 가능한 한 고해성사(판공성사)를 보도록 권한다. 헌 육신을 벗어버리고 새 생명을 얻기 위해, 묵은 때와 진 자리를 치우는 행동들이다. 놀라워라, 절기력과 전례력이 이렇게 척척 들어맞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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