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문

하늘 천 따 지

by 뚜와소나무

몇 년 전 천자문 전시회가 있다는 뉴스를 보고, 국립중앙도서관 5층에 갔다.

전시실에는 그림으로 된 천자문, 중국어 발음이 써져있는 천자문, 일본어가 첨가된 학습용 천자문,

조선시대의 한글 설명문이 붙어있는 천자문, 심지어 2 천자문, 전서해서 초서가 다 써져있는 천자문까지

정말 다양한 천자문 책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지리산 아래 조그마한 읍에서 자랐고,

50년 전 즈음 할아버지께서 친히 쓰신 천자문 필사본으로 천자문을 배웠다.

우리 5남매는 옆방에서

할아버지의 책 읽는 소리, 논어를 통째로 외우시는 소리를 들으며

매일 아침잠을 깨고, 매일 저녁 잠들었다.

언니와 남동생 나, 이렇게 세 명이 무릎을 꿇고 하루에 여덟 글자씩 배웠다.

천자문 한 권을 펴놓고 셋이 동시에 배우다 보니

부채처럼 머리를 맞대고 몸만 따로 떨어져 앉았던 기억이 난다.

언니와 남동생은 나보다 뭐든 잘 외웠다. 나중에 한글과 숫자도 나만 좀 늦게 터득했다.

매번 수업의 시작은 첫 페이지부터 ‘하늘 천 따 지 검을 흑 누르 황’으로 시작되었고,

외워야 할 글자 수가 나날이 늘어났다.

복습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결국 나에게 과부하가 걸렸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대문 밖 동네 친구들의 고무줄놀이 소리가

내 귀에 확성기 대놓은 것처럼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입으로만 따라 할 뿐 눈과 마음은 천자문 책 너머 딴 곳에 가 있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전날 배운 글자가 단 한 개도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언니와 남동생의 표정을 살피며 슬쩍 커닝을 시도하다가

그것도 제대로 못해서

결국 댓돌 위에 올라가 바지를 접어 올리고 회초리를 두 대 맞곤 했다.

한 번은 천자문을 배우다 킥킥거려서 혼난 적도 있었다.

가요라는 말의 뜻(훈)과 소리(음)는 ‘노래 가(歌), 노래 요(謠)’이다.

나는 이 두 글자를 배우다가 장난기가 동하여 옆에 있는 언니에게

‘노래가 노래지 그럼 뭐야. 크크크 ’라며 떠들다가 딱 걸렸다.

또다시 댓돌 위로 올라가 종아리에 떡국떡 모양의 흔적을 떡하니 남겼다.

할아버지께서는 천자문을 여러 권 쓰신 후 내 사촌들 집으로 한 권씩 나눠주셨다.

다른 집은 부모가 가르쳤겠지만,

우리 남매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할아버지께서 직접 가르치셨다.

아버지는 “공자님도 자기 자식은 못 가르쳤다더라.”며 일찌감치 손을 떼셨다.

한때는 내가 천자문 배우기 싫다고 울고 불고 해서 얼마간의 공백도 있었지만,

수년 후 방학 때마다 명심보감이나 사서삼경을 할아버지께로부터 틈틈이 배워서

주역을 제외하곤 다 배웠다.

주역은 혼자 읽었는데, 할아버지 말씀처럼 배운다고 아는 것도 아닌 묘한 책이었다.

나는 깊이 있는 사유를 하는 기질도 아니고,

두뇌가 비상한 편도 아니어서 주역의 이치를 깨닫길 일찌감치 포기했다. 읽어만 봤다.

천자문을 배워서 뭐가 좋았을까?

내 경우에는 이해력과 학습능력, 효율을 높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어휘가 어려워진다. 특정 의미를 담고 있는 글자들이어서 그렇다.

한자를 알고 있으니 어떤 의미인지 대략 추정할 수 있었고,

선생님께 단 한 번만 설명을 들어도 그대로 기억할 수 있었다.

은퇴하고 뭘 할까 생각하다가 기회가 있다면 방과 후 학교에서 한자 수업을 해보고 싶었다.

지루했던 옛 방식을 탈피해서 신선하고 즐겁게 익힐 수 있는 천자문을 가르치고 싶다.

큰애 결혼식 후에 나는 한자 2급 시험을 봤고, 합격해서 자격증을 받았다.

서울시내 초등학교에서는 한자 수업을 해줄 방과 후 선생님 모집이 많다.


그런데 시골학교에서는 한자 수업 수요가 거의 없다.

내가 사는 시골에는 댄스나 악기와 관련된 수업을 해줄 선생님을 더 원한다.

게다가 코로나로 방과 후 학교 선생님 모집이 막혀

나는 아직까지 기회를 얻지 못했다.

문해력이 떨어지는 이 시대를 생각하면

더 많은 한자수업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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