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할 무렵이면 떠오르는 일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 방학 직전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그날도 여느 때처럼 학교에서 돌아와 동생들과 한참 뛰어놀았다.
그리고는 더위와 피로에 지쳐 시원한 다락방에 올라가 곯아떨어졌다.
어찌나 피곤했는지 저녁밥도 먹지 못하고 쿨쿨 잠만 잤다.
다음날 아침, 식구들이 상에 다 둘러앉아있을 때까지 컴컴한 다락방에서 자다가
동생의 국그릇 떨어뜨리는 소리에 화들짝 잠이 깼다.
나는 다락방에서 내려와 아침을 먹고 가방을 부랴부랴 챙겼다.
일찍 자느라 숙제를 하나도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시계를 보다가 학교에 빨리 가서 나머지 숙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에겐 먼저 간다는 말도 못 하고, 가방을 메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약간 어두웠지만 큰길로 걸어 나가
하천 위 다리를 건너서 학교 앞 문구점을 지나가는데,
두어 명의 아이들이 문방구에서 뭘 고르는 모습을 봤다.
속으로 ‘나보다 일찍 학교에 온 애들도 있구나.’ 생각하며 종종걸음으로 학교 정문으로 갔다.
정문 앞에 도착해보니 정문이 잠겨 있었다. 너무 일찍 온 것이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면서 멀리 교문 안의 학교 건물을 보니
운동장에는 인기척이 없고, 행정실 쪽에 희미하게 불빛이 느껴졌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좀 두려웠지만 살짝 용기를 내
암벽 등반하듯이 대문을 타고 올라가 반대쪽으로 넘어갔다.
그리고는 커다란 학교 운동장을 씩씩하게 가로질러 뒤쪽 건물로 갔는데
거기도 역시나 닫혀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행정실과 교무실이 있는 본관 현관문으로 돌아가서
복도를 통해 뒤쪽 건물의 우리 교실로 갈 수 있었다.
열쇠를 찾아 교실 문을 열고, 불을 켰다.
잽싸게 공책을 꺼내놓고 숙제를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숙제를 하는데 교실 앞문이 드르륵 열렸고,
다른 학년 선생님이 나를 쳐다보셨다.
선생님도 나도 그 순간 무척 놀랐다.
“너 뭐해?”
“숙제하는데요.”
“집에 가서 숙제해야지 왜 여태 집에 안 갔어”
어리둥절한 나는 “예?, 지금 학교 왔는데요?”
그러자 선생님은 더욱 놀라셔서
“지금 저녁 8시가 넘었는데, 무슨 소리야?”
나는 완전히 어리둥절했다.
이 모든 상황이 꿈속에서나 벌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선생님은 온전치 않아 보이는 나를 데리고
교실을 나가 복도를 지나서
교무실 옆 중앙 현관에 도착해서는 ...쫓아내듯 방출하셨다.
운동장은 아까보다 더 어둑어둑해졌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운동장엔 아무도 없었다.
나 혼자 걸어 나오는 ‘현관에서 교문까지의 거리’는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것 같이 멀어보였고 무서웠다.
혼자서 뭐라 뭐라 중얼거리다가 노래도 불렀다가 말았다가 하면서
내 딴에는 아주 힘들게 꾸역꾸역 교문까지 왔다.
그리고는 또 닫힌 교문 앞에 섰다.
그런데 쇠막대기로 잠긴 그 문을 열고 나가면
밤새도록 교문이 열려 있을 것 같아서 차마 쇠막대기를 옆으로 치울 수가 없었다.
어둠이 짙어져 잘 보이지도 않는 교문을
손으로 더듬고서 달달 떨며
이번에도 교문을 암벽등반하듯 올라갔다.
교문을 벗어나서야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내가 낮잠을 좀 길게 잔 것이었고,
다음날 아침밥을 먹은 게 아니라 그냥 저녁밥을 먹은 것이었으며
지금은 오전이 아니라 오후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우쳤다.
문방구 앞을 지나니 아까 있었던 애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문방구도 불이 하나씩 꺼져가고 있었다.
다시 하천의 다리를 건너 우리 동네로 들어왔고, 거기서 5분 후 우리 집 대문 앞에 도착했다.
가족들이 ‘허튼짓 하고 돌아온 나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잠깐 눈치를 살폈다가
잽싸게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숙제를 마저 했다.
며칠 후 우리는 신나는 여름방학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