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빼고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건 ‘개’입니다. 덩치가 크고 황금색 털이 가득한 골든 리트리버가 제일 좋지만 ‘개’라면 어떤 종이든 크기든 다, 보기만 해도 미소가 절로 나오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사람처럼 ‘개’들도 개마다 성격이 다 다르고 인물이 다르고 지능도 다릅니다. 그러나 못난 데로, 까칠한 데로, 소심한 대로 세상 모든 개들은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막 짖어대고 무섭게 구는 녀석들조차 다 이유가 있기에 지가 더 겁이 많아 지레 선수를 치거나 혹은 경계심에 날이 서서 상대를 제압하려 하거나 혹은 그냥 성질이 못돼서지만 그럼에도 그 본성에는 주인에 대한 충심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종이죠. 인간만을 볼 수 있는.
두 번째로 좋은 건 ‘원숭이’입니다. 개처럼 자주 볼 수 없는, 랜선으로 만나는 친구이긴 합니다만 저는 원숭이가 좋습니다. 특히 아기 원숭이의 무해한 얼굴은 인간과 너무 닮아있어서 아기를 가슴에 매달고 있는 엄마 원숭이의 영상을 한동안 많이 봤습니다. 저 같은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영상이 계속 만들어지고 과연 그게 옳은 일일까 의구심이 들면서도 저만의 힐링 영상들에 자꾸만 손이 가던 시절이었죠.
그래서 오늘은 그 시절 제가 만난 원숭이 얘기를 해 볼까 합니다.)
중국에서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 새끼 원숭이를 빼앗긴 어미 원숭이가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죽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를 한자로 ‘단장’이라고 하는데 애끓는 심정이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짐승이라도 가엽기 그지없다. 그 모성이 사람과 다르지 않은데 여러 영상을 보다 보니 마음에 맺히는게 많았다.
첫 번째 원숭이는 나타샤.
나타샤에게는 눈이 안 보이는 새끼가 있다. 처음에는 그저 가슴에 매달고 다니며 젖을 먹이고 에미가 보호해주니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일 년이 지나 독립할 때가 되자 볼 수 없는 새끼 원숭이는 나무를 오르내릴 수도, 살아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된다. 나타샤는 너무 커버린 새끼를 가슴에 매달고 힘겹게 나무를 오간다. 수컷들은 그런 나타샤에게 제 새끼를 갖게 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인간이라면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새끼를 돌보겠지만 다 커버린 새끼를 어미 원숭이가 언제까지 품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두 번째 원숭이, 나쁜 엄마 케이티.
사원의 한 귀퉁이 차가운 바닥에서 태어난 지 몇 시간이 안 된 아기 원숭이가 누운 채 팔다리를 버둥거리고 있다. 아기 엄마는 옆에서 멀뚱히 쳐다보다 잠시 망설이는 듯 다가가 슬쩍 건드려 본다. 아기는 본능적으로 엄마 쪽으로 기어가려 애를 쓰고 무심히 바라보는 나쁜 엄마 케이티.
‘그러지 마. 네 새끼잖아. 얼른 안아 줘’ 안타까워 죽겠다.
‘어째 너는 모성이 없니? 원숭이라고 다 같지는 않구나.’
간신히 엄마 옆으로 다가온 애기를 툭 밀치니 계단 아래로 구른다. 잠시 바라보다 결국 고개를 돌려 가버린다. 그렇게 케이티는 새끼를 버리고 떠났다. 에미가 없는 새끼란 죽은 목숨이 아니던가. 그렇게 버려지는 새끼도 꽤 있다고 한다. 인간도 제가 낳은 새끼를 방치하고 버리는 일이 다반사라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
세 번째, 팥쥐 엄마 같은 엠마.
케빈은 엄마가 없는 수컷 원숭이다. 아직 젖을 먹어야 하는 아기인데 어떤 연고인지 엄마가 없다. 원숭이사회에서는 아기를 유괴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니 이 아이의 기구한 사연이 어느 쪽일지는 알 수 없다. 다행히 이미 젖먹이 딸을 키우고 있는 엠마가 케빈까지 둘을 끌어안고 매달고 다닌다. 그런데 영상을 보는 내내 가슴이 찢어지는 건 엠마가 케빈을 심하게 내리누르고 죽기 살기로 젖을 주지 않으며 그저 데리고만 다녀서다. 자식을 차별하며 화풀이 대상으로 삼는 계모의 모습 그대로였다. ‘못됐다. 못됐어.’ 소리가 절로 나는데 그나마 조금씩 먹여주고 데리고 살아주니 목숨은 부지하는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구나. 포동포동 살이 올라 힘이 세져서 케빈을 찍어 누르는 딸내미를 이뻐하는 엠마와 왜소한 체구에 기운이 없어 버둥거릴 뿐 일어나지도 못하는 케빈을 보며 저 엄마 원숭이의 속은 무얼까, 그리 구박 하면서 또 소유하려 드니 그 양쪽의 감정은 무엇이지, 본능에 따른 건가 하면서도 괘씸하다. 결국 케빈은 어떤 젊은 암컷이 유괴해서 내 데리고 다니다 죽었다고 한다. 새끼도 키워보지 않은 천방지축 암컷이 인형 놀이나 엄마 놀이 하듯 안고 다니지만 정작 젖은 나오지 않고 아무것도 먹이질 않으니 서서히 죽어갈 수밖에. 차라리 엠마 품에 계속 있어야 했는지 아니지, 카메라 들고 다니는 인간들은 뭐 했는지, 한동안 화가 났었다.
그 외에도 내게는 기억에 남는 여러 원숭이가 있었고 특히 그들의 모성애에 관심이 많았다. ‘모성’이란 내 삶을 관통하는 큰 화두이며 숙제이기도 하다. 동물학자도 전문가도 어떻게 결론을 내렸는지 모르겠으나 내게 모성이란 (고등동물의 경우) 그 개체의 고유한 특징 내지는 선택이다. ‘동서고금’, 그야말로 어느 시대 어디든, 동물이든 인간이든 평균적인 성향은 있겠으나 새끼를 버리거나 헌신하는 정도의 차이는 개체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새끼란 한없이 무능력한 존재로 어떤 모성을 만날지는 복불복이 아닐까? 에미의 사랑에도 그야말로 금수저, 흙수저가 존재하니 살뜰한 보살핌을 받고 자란 행운아들은 그 힘으로 더 크고 단단해진다.
에미에게 버림받은 동물이란 살아남지 못하겠으나 인간의 경우는 결핍과 상처를 안고 어른이 된다. 그리고 보호받아야 할 어린 시기에 부모로부터 속절없이 받았던 상처는 언제나 마음 한 켠을 차지하고 살다가 맥없이 상처를 건드리는 일에 여전히 아파한다. 좀체로 아물기 어려운 상처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고 그 자신 어떤 부모가 될지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을 많이 받고 안 받고를 떠나 좋았던 기억과 행복한 추억들 몇 가지로도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좋은 부모가 되려 애를 쓰기도 한다. 어릴 적 상처에 발목 잡히지 않고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게 인간의 의지이고 희망이다. 여전히 원숭이보다 못한 모성이 있고 모성이 없는 원숭이들과 동급인 인간들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인간은 인간답고 존엄하다. 동물을 넘어서는 인간만의 선과 사랑이 있기에 우리의 삶이 의미가 있고 소중한 게 아닐까? 동물은 본능에 충실히 살아가고 사람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존재이지만 역시 제일 좋은 건 사람이다. 원숭이보다 강아지보다 사람이 좋다. 이쁘고 소중한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