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갖가지 중독이 있다지만 구박에 중독되다니. 원하지 않는 일을 나도 모르게 반복, 집착하고 병적 쾌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중독이 맞다. 하지만 병적 쾌감까지는 아니고 약간의 불쾌감을 동반한 약간의 쾌감 정도라면? 단순한 괴롭힘, 갈굼일까?
고백컨데 이유 없이 같이 사는 배우자를 구박할 때가 있다. 반대 입장으로 내가 당할 일은 절대 없다(상대는 구박을 습관화할 만큼 부지런하지 못하므로). 좁게 보면 구박이요 넓게 보면 일종의 유희라고도할 수 있겠다. 최근 봤던 ott시리즈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범고래는 먹잇감을 포획하고서도 입속에 털어 넣는 대신 몇 번이고 공중제비를 돌린다고 한다. 갖고 노는 행위, 유희다. 순수하게 재미만을 위해 잔인하게 먹잇감을 희롱하고 괴롭힌다는 범고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좀 섬뜩했다. 내 안에 있는 어떤 감정과 어렴풋이 일치되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집 안에서 상대를 구박하는 방식과 종류, 내용과 방법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생활 중 자주 하는 것은 나쁜 습관에 대한 놀림이나 지적이다. 육식에 집착하는 식습관, 청결은커녕 아노미 상태인 개인 공간, 여름이면 반복되는 상반신 노출증, 그것으로 드러나는 특정부위 지방층 등 전국 수많은 기혼남들에게 공히 해당될 것들이 잔소리나 지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다만 이런 소재는 1년 365일 언제나 놀림감인 대신 특별한 반향을 끌어내기 어렵다. 전혀 타격감이 없는 것이다. 그저 몇 마디 훈계하고 싶거나 왠지 모르게 모든 스트레스를 상대방에게 풀게 될 때 그야말로 이유 없이 꺼내 들곤 하는 것이다. 상대는 공부하라는 부모님 잔소리처럼 그저 묵묵부답일 때가 많다.
조금 더 효과적인 것은 소소하나마 행동으로 하는 것이다. 상대가 싫어할(게뻔한) 행동을 해두고 지켜보는 것. 기다리는 동안 몽글몽글 기대감이 생긴다. 개인 공간 창문을 활짝 열어 오래 환기를 시켜 방을 차갑게 얼려버리기, 옷가지들을 마음대로 건조기에 넣거나 집안의 리모컨은 모조리 숨겨두기. 좋아하는 음식을 냉동실에 넣어 두기 등등. 이런저런 이유로 상대가 얄미워질 때 나도 모르게 반복하는 좀 유치한 습관이다. 어쩌면 직접 보게 될 반응보다 유치할지언정 나도 뭔가를 벌여야만 후련해져서 하게 되는 행동이기도 하다. 이런 것들은 다소 반응을 일으킨다. 귀가한 상대는 짜증스러워하거나 허탈해하거나 또 당했다는 식으로 체념하거나 한다.
마지막은 상대방 스스로도 수치스러워하는 흑역사를 꺼내 조목조목 언급하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웃기지도 않은 과거 정치적 입장이나 의견, 사회 초년생시절 짧은 경험을 과장해 말했던 것이나 어리석은 판단, 사람에 대한 잘못된 편견 등등. 특수 관계로 오랜 기간 지켜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갖가지 실수와 파생된 부작용을 시의 적절하게 꺼내 되새김질해주는 것이다. 게스트가 있는 술자리에서 쓴다면 직방이다. 경우에 따라 발작 버튼으로도 작용할 정도니 아무 때나 꺼내 쓸 수 없는 대신 효과는 상당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구박의 심리적 배경은 뭘까? 내무반이나 교실 같이 폐쇄되고 한정된 생활공간 안에서는 관계에 따른 물리적 언어적 폭력이 상습적으로 벌어지기도 한다. 내가 하는 구박 역시 폭력의 형태는 아닐지언정 그 속성을 갖고 있는 것 아닐까. 익숙하고 편안한 세상 단 하나의 공간에서 익숙한 상대에게 잘 아는 방식으로 뭔가를 먼저 행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어느 순간 무감각해진 채 아무런 고민과 이유 없이. 상대방이 진짜 문제를 일으켰거나 나에게 해를 가한 것도 아닌데 그저 내가 외부에서 받은 스트레스의 농도와 질량에 따라 상대방의 습관과 동일한 태도가 밉게 짜증스럽게 보일 뿐인 것이다.(물론 짧지 않은 특수관계 역사상 상대가 가정경제에 해를 끼칠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경우도 분명 있다!)
밖에서 일어난 갖가지 일들과 복잡한 상황, 사회적 관계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내가 개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편안하며 통제 가능한 공간에서 반복적 말과 행위를 통해 쏟아낸다. 누군가에게. 그러면서 나는 아직 괜찮다는 안정감을 얻는 것 같다.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문득 상대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 자체를 번잡스러워하고 웬만해서는 적극적 형태의 질문을 갖지 않는 성격이니 별 생각은 없을 것 같다. 그저 생활의 흐름에 자신을 맡겨둘 뿐. 비가 오면 오는 대로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크게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