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건 안 하던 것을 하면 티가 나게 마련이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지금은 성탄절 다음날인 26일 오후, 어제까지는 도심곳곳 캐럴이며 루미나리에였다면 오늘은 급강하한 기온과 한파만이 뉴스를 뒤덮은 것 같다.
그래, 한때는 우리도 그랬더랬다. 메리 크리스마스를 열심히 준비하며 서로를 사랑스러워하던 연인. 하지만 지금은 가정 내 공동 산타 활동과 학교 안팎으로 이어지는 각종 학예회성 행사 참석이나 연말 가족모임에만 열심일 뿐이다. 둘중 누가 참석가능한지와 가족 모임 일정 같은 것을 확인, 업데이트할 뿐 서로의 기분이나 받고싶은 선물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상태.
어쨌거나 금년에 한 해서라도 연중 조금이나마(?) 고마웠던 것들을 상기하며 가성비 좋은 뽀글이 플리스 하나를 사두었다. 품절이 쉬운 사이즈인 만큼 서둘러 구입 완료. 양심상 짠! 까지 하며 주기는 힘든 품목이므로 오다주웠다식 콘셉트로 대충 건네고는 생색이나 좀 내볼까 했던 것이 계획이라면 계획이었다. 구입완료, 펜트리쪽에 별도 보관한 것으로 준비는 충분하니 그 이상은 의식(무의식)적으로도 신경 쓰지 않았다….
며칠이 후루룩 가고, 월에 한 번쯤 만나는 직계 가족이 올해 크리스마스도 이변 없이 솔로를 유지하는 관계로 예년처럼 우리 집을 방문, 함께 먹고 마시며 성탄전야를 보내기로 했다. 인근 고깃집을 하나 예약해 두고 홀이냐 별도 좌석이냐, 당일이냐 전날이냐로 조금 조정을 하다가 역시 이벤트는 전야지! 하며 24일로 확정, 굽고 마시는 날로 잡았다. 그리고 부부 공동 주관인 자녀 대상 산타 활동을 본격화했다. 아직은 저학년이라 분명 공동 현업이므로 한달전부터 머리를 맞대 원하는 선물을 모색, 당사자 간접 조사까지 마치고 품목을 엄선했다.(산타 명의 선물이지만 부모 주관이므로 큰 부담이 없고 실용성도 적절히 담보해야 하는 것이 선물 선정 핵심이다) 나름대로 고민 끝에 최종 장난감 검과 방한 실내화로 정리하였다. 장난감 검이라니 패스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빈약한 영문과 국문으로 간곡히 산타에게 서신을 써둔 갸륵한 정성에 감화되어 별 수 없이 검을(두 자루나!) 주자고 합의했다. 그리고 즉시 구입, 포장 완료 하도록 시켰다. 대부분 가정과 비슷하게 우리 집 역시 모친 세부 기획, 부친 실무 준비 추진인 관계로 배우자는 추운 날 바깥바람을 맞으며 오가는 수고를 해야 했다. 하지만 미안함은 잠시, 들고들어 온 것을 보니 웬걸 역시나 센스 부족으로 산타표 선물과 아빠표 선물이 같은 포장지에 둘둘 싸여 있었다, 누가 봐도 세트 선물이건만 부득부득 우기며 하나는 아빠표 선물로 증정하겠단다. 자녀 역시 다소 센스가 부족하길 바라며 두 개 선물을 각각 별도 장소에 보관, 심어두고 그럭저럭 준비를 마쳤다. 이어서 며칠간 부지런히 학교와 학원 행사에 참석했다.
그리고 맞이한 성탄 전야는 직계가족 1인 동석하에 연중 수고한 우리 모두를 위한 외식이었다.
부지런히 집게를 놀려 굽고, 붓고 마시고 한 해간의 노고와 밀린 근황을 떠드는 데 피치를 올렸다. 중년에 접어든 세 사람이 신나게 마시는 동안 잔뜩 기대에 찬 꼬마가 졸기도 하고 끼어들기도 하는 사이 성탄 이브밤이 훌쩍 지나 갔다. 퉁퉁 부은 눈으로 성탄절 아침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지만 역시 미성년자가 제일 먼저 기상, 기대감으로 온 집안을 뒤적였다. 역시 두 개 선물을 무난히 발견 확보했고 엄마표 선물까지 추가 증정하고 나니 성탄절 오전이 다 가 있었다. 그래도 성탄 휴일을 그냥 보낼 수는 없어 전부터 계획했던 공공기관 라키비움 한 군데를 들러보고 종교 행사를 참례하기로 했다. 교통난 속에 점심 해결, 라키비움을 둘러보고 책을 뒤적이고 느지막이 종교 행사를 마치고 나니 그래도 알찬 성탄이 된 것 같아 스스로 만족했다.
그리고 지금 떠오른 것이 덩그마니 팬트리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플리스 XL다. 그렇게 뒤로 넘겨두고 온 것이 플리스 한 벌만은 아닐텐데. 구겨지거나 쓰러져 있을 그것을 떠올리니 어딘가 씁쓸하면서도 슬프지는 않은, 왠지 모를 익숙한 감정이 찾아들었다. 그럭저럭 할 것을 다 했다는 안도감과 약간의 아쉬움이 조금 엉키는 순간이랄까.
그래 사라진 건 아니고 남아 있는 것이니 나쁘지 않다! 생각한 대상에게 주면 되는 것이다. 다만 처리하듯 주지 말자. 준비한 것을 준비한 그 마음 그대로 건네주자. 가볍게. 오늘은 까먹지 말고.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