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합상황실에서 들리는 말푸르륵 소리와 감독관 부_2

by 장판

시간이라는 것은 종종 신기하게 작동하기도 한다. 모두가 정한 약속일 뿐이니 사실 신기한 것이 아니며 그저 어느 특정한 때 한 개인에게 그렇게 느껴질 뿐이다. 이를테면 국제공항 같은 곳에서 트랜스퍼 항공편을 기다릴 때. 5시간쯤 대기하다 보면 시간은 매니큐어처럼 찐득찐득하게 흐른다. 국제공항 대합실 한가운데에서 이미 벤치를 차지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널브러져 있자면 일상에서는 잘디 잘게 나눠도 모자라던 시간이 어디선가 대량 투척된 듯 과다해진다. 주체할 수 없는 시간에 휩싸인 채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는데 급하고 긴하던 세상 모든 것은 사라지고 모든 결정에 무감해져 버릴 지경이 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될 대로 되라지. 머릿속에 오직 한 가지만 남는다. 갈아 탈 항공편뿐.

엿기름처럼 찐득하던 시간이 어딘가에 멈추긴 했는지 모국어가 아닌 말로 방송이 들려온다. 주섬주섬 펼쳐둔 가방과 캐리어를 여미며 귀를 쫑긋거리지만 나를 태울 비행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다시 모든 것은 다시 나른해져 버린다. 또 얼마간 시간은 매니큐어처럼 찐득하게 흐르고 이제 진흙이 되어 굳어버렸나 싶을 때쯤 다시 알 수 없는 국적의 사람들이 하나같은 모양으로 줄을 선다. 졸린 눈을 비벼 다시 보지만 내가 탈 비행기가 아니고 바로 앞 항공편. 그러다 마침내 창문 너머로 진짜 타야 할 항공기가 보이고 주섬주섬 티켓을 꺼내 좌석을 확인할 때쯤 시간은 다시 온전한 방식으로 흐른다. 적정량의 시간이 적정한 속도로.


지금 저 말 푸르륵 소리는 어떤 항공편과도 관련이 없고 어떤 국적의 방랑자와도 관련이 없다. 그저 매니큐어와 같은 상징적인 존재이며 이곳에도 시간이라는 것이 있음을 알려주는 최소한의 장치인 것만 같다. 이곳은 그 이름부터 나른해서도 무료해서도 안 될 것 같은 곳인데. 국제공항의 방랑자들처럼 널브러져서도 자고 있어서도 안 된다. 굳이 우리와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우리도 분명한 공동의 목적을 갖고 무언가를 대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항공편과 같이 간절하게는 아니고 경계하며. 아주 낮은 가능성이나마 그것이 닥쳐올까 두려워하며.


지금 이곳에서는 사건사고가 이어지고 있다. 다만 티브이 수신기 화면 안에서다. 어느 자리 누구든 보일 수밖에 없는(마치 그들 모두를 내려다보듯) 조금 높은 위치에 티브이 수신기가 있다. 본디 제 소리를 잃어버린 채 묵묵한 하인처럼 사건사고만을 성실히 전하는 화면은 전국 곳곳, 세계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고 있거나 벌어진 사고들을 쉼 없이 보여준다. 화재, 가스유출, 철로이탈, 공격, 폭발폭발 폭발들. 무음 속에 보이는 사건사고는 (그저 각자의 나른함 정도를) 경계하고 있는 4인의 현업자들에게 일정 수준의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언제든 저렇게 될 수 있다고. 그러므로 너의 책임이, 정확히는 전달하지 못한다면 너의 책임이 될 수도 있음을 막연히 고지한다. 송출되는 화면은 약간의 공동체 의식과 각자의 책임을 소리 없이 일깨운다. 우리 가까이에서 사고가 벌어질 수도 있음을 주지 시키고 그것에 대비해야 함을.


다시 소리로 돌아가자. 다른 시간 어리목 근처 한라산 관광안내소 2층 널찍한 사무실에서도 저 아날로그적 소리가 반복되었다. 지금은 사라졌을지 모르는 그곳에 아직 머무르고 있거나 퇴직했을 사람들이 빚어내던 소리. 그들 중 한 두 명이 아직도 비슷한 어딘가를 지키고 있다한들 그 소리를 다시 들을 수는 없다. 80년대 후반, 늦어도 90년대 초반 사라졌을 알루미늄 주전자와 난로가 있는 교실을 연상시키는 그곳에서도 저 나른하고 반복적인 소리가 이어졌었다. 실무자의 방문 횟수는 얼추 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니 그만하면 그곳에 머물던 소리라 해도 충분할 것이다. 푸르륵푸르륵. 제주특별자치도에 아무리 말이 흔하다한들 현장 일대에는 목장이나 초원이 전혀 없었다. 등산로와 그 뒤로 모래바람 날리는 공사장뿐이었다. 결정적으로 소리는 실내에서 들리던 것. 차분하고 지루하게 한 결 같이 푸르륵푸르륵이었다.


상황실 파티션 끝자리의 한 명이 조용히 일어선다. 나머지의 눈과 귀가 그녀를 쫓는 대신 그들의 의식이 그녀를(혹은 그를) 따라나선다. 쫄래쫄래, 혹은 털래털래. 그녀와 함께 나가버리고 싶은 심정. 활짝 열린 저 유리문 너머로. 방문객을 향해서만 활짝 열린 문은 우리 모두에게는 오직 한 순간을 위해 필요할 뿐이다. 모두의 한 결 같이 바라는 결정적 순간. 퇴근 시간.


이미 그들은 오전 시간 하루치 수고를 다했으나 시간은 가혹하게도 넉넉히 남아 있다. 비록 그들 중 단 한 명만이 민원을 접수하고 그것에 응답하였으되 그것은 분명 4인 체계의 업무 분장 상 응답한 것이므로 그녀의 답변은 그들 모두의 답변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어떠한 도덕적 책임도 양심의 거리낌도 없다. 단 한 명 가마 위로 흰 머리카락이 분수처럼 솟아나기 시작한 그녀에게. 지금 저 유리문 밖에서 목을 가다듬으며 물을 마시고 어깨를 돌리고 있는 그녀에게. 오전에는 (도저히)할 수 없던 스스로를 돌보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동작들을 이제야 마치고 돌아온 그녀에게 나머지 셋은 미안해해야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매우 정당하고 공정한 방식으로 그렇지 않다.


마침내 그들 모두에게 오로지 단 한 가지 공정한 것이 다가왔다. 시간. 절대적 시간 앞에 그들 모두는 완벽하게 공평하다. 모두가 똑같이 돌아갈 자유를 얻는다. (이미)모든 시민을 위해 활짝 열려있으며 앞으로도 열려있을 강화유리문으로 조용하고 평화롭게 한 명씩 빠져나간다. 가장 먼저 휴대폰을 주시하던 이가 탈출하듯 문을 박차고 나선다. 친절히 마라톤 대회의 루트를, 정확히는 통제된 구역을 설명하던 그녀도 문을 나선다. 이어서 팩스가 올까 두려워하면서도 오지 않을 팩스를 기다리던 이가 그곳을 빠져나간다. 마지막으로 사령관의 이름을 달고 나머지 셋과는 구분된 자리를 지키던 이도 가볍게 문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얼마간 가만한 시간이 흐르고 알 수 없는 또 한 명이 그곳을 나선다. 그림자처럼 순식간에 빠져나가고 곧 다시 누군가가 또 문을 빠져나간다. 다시 문이 열리고 닫히기도 또 다른 그림자가 문을 빠져나간다. 또 빠져나간다. 터질 듯 밀려들어오는 팩스 용지처럼 문은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한다. 멈추지 않을 것처럼. (^^감사)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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