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노란 집

심심하면 왜 안 되나



전쟁 중에 결혼해서 두 살 터울로 아이를 다섯씩이나 난 여편네가 언제 심심할 시간이 있었겠는가. 막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가족을 위해 24시간 봉사해야 하는 생활로부터 어느 정도 놓여나 비로소 자기만족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의 여유가 생긴 걸 그렇게 말한 거였다. 그때까지 나는 심심할 수 있는 시간을 얼마나 갈망했던가. 심심하고 싶어 미칠 것 같은 때도 많았다.

돌이켜보면 유년의 시간이 칠십 평생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건 심심할 수 있는 시간의 넉넉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심심해서 베개를 업고 자장가를 불렀고, 게딱지로 솥을 걸고, 모래로 밥을 짓고, 솔잎으로 국수를 말았다.

-첫 문단 데뷔 인터뷰  中



고 박완서작가의 '노란 집'은 짧은 단편소설과 함께 2000년대 초반부터 아치울 노란 집에서 써 내려간 산문들을 엮어 내놓은 책이다. 이 책은 그녀의 장녀가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마지막으로 그녀의 따스한 글을 세상에 내놓았다. 마음속 어린애는 아직도 엄마를 부르는데 나는 어느 틈에 할머니가 되어 있다는 딸의 서문은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나는 박완서 씨의 글을 읽으면 행복하다.  내 마음을 마치 읽은 사람처럼 갈증들을 아름답게 풀어 주신다. 그래서 그분이 돌아가셨을 땐 마음의 어머니를 잃은 듯 무척 힘들었었다. 한국사의 격동기를 체험하셨고 그 어렵고 가난했던 삶 속에서 서민들의 애환과 사랑을 글로 엮어내셨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편안했던 이유는, 그분이 행복하게 살다 가셨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분은 생전유언을 원 없이 글로 풀다 가셨단 생각이 든다.


우리가 유년시절의 추억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을 '심심해서였다'는 표현을 생각해 낼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전쟁 중에 결혼해서 아이를 다섯씩이나 난 주부가 자기만족을 위해 조용히 글을 쓸 수 없었던 시간의 괴로움이 그녀는 힘들었다. 늦은 등단에도 꿈을 놓지 않았던 그녀의 힘은 심심함의 갈망이었다. 우리가 유년시절의 시간이 어른의 시간보다 길게 느껴지는 것은 심심할 수 있는 시간의 넉넉함 때문이다. 동심의 눈은 깨끗하다. 자연을 자세히 탐구하고 어른을 탐구할 줄 안다.


그녀의 노년을 마감한 노란 집 생활은 그렇게 심심하지만 오붓한 혼자만의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왜 그렇게 혼자 있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다.  내 손으로 거둬야 할 식구가 많았고 책임감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혼자 조용히 책 읽고 조용히 글 쓰고 싶었다. 이 작은 소망을 30년 직장생활을 마치고 시어머님과 친정엄마가 영면하신 후에야 갖게 되었다. 중년이 된 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심심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혼자인 시간은 왜 좋은가.  상상력의 원천인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해 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오롯이 챙길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젊은 시절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겠지만 말이다. 그녀는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아치울 노란 집에서 편안하게 자연과 더불어 글과 마주하며 사셨다. 늙어도 스스로 자기 발로 걷고, 먹을 것을 해 먹을 수 있는 건강에 감사하면서.. 나도 그녀처럼 살고 싶다.


혼자 걷는 게 좋은 것은 걷는 기쁨을 내 다리하고 오붓하게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다리를 나하고 분리시켜 아주 친한 남처럼 여기면서 칠십 년 동안 실어 나르고도 아직도 정정하게 내가 가고 싶은 데 데려다주고 마치 나무의 뿌리처럼 땅과 나를 연결시켜 주는 다리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늘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매일매일 가슴이 울렁거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생의 마지막까지 경쾌함과 진지함의 균형 감각을 잃지 않았던 박완서 씨의 글이다. 책은 여섯 개의 장으로 나눠 있고 서민들의 삶을 동화처럼 편안하게 옮겨 놓은 듯한 짧은 이야기들이 따스한 일러스트와 함께 녹아있다. 출간되거나 계간지에 소개되었던 글들이 중복되어 실려 있지만 독자들은 전혀 불편하지 않다. 삶의 여유는 거창한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시를 읽는다


박완서   


심심하고 심심해서 시를 읽는다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노란 집 / 박완서 저>






매거진의 이전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