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brunch story)에 지난 3월에 입성하고 여러 작가님들의 글을 조심스레 읽고 있던 차에 은둔호랑 e 님이 단편소설집을 출간한다는 글을 접하게 되었다. 책 출간만 한다고 저절로 독자에게 선택받고 만나는 세상이 아니다 보니 직접 책 홍보에 나선 것이었다.
탈고하고 책이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고충이 있었을 텐데 홍보까지 하는 무명작가의 설움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서슴없이 신청을 했고 책과 함께 저자가 직접 만든 빵까지 선물로 귀하게 받았다.
책날개 작가소개란 첫 줄에는 30여 년간 기업체에서 근무했다는 경력이 첫 줄에 적혀 있다. 그리고 다음 줄엔 '어려서부터 문학소년의 꿈을 꿈'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마치 순수했던 어린 시절, 가슴에 담아두었던 작가라는 간절한 꿈을 이루기 위해 현실과 타협한 시간이 30여 년이 걸렸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가슴이 좀 뛰었던 것 같다. 나도 이분처럼 용기를 가져 볼까..
나는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작가가 선정한 책제목을 의미 있게 보는데 '시절인연'이다. 불교용어로 모든 사물의 현상은 인과의 법칙에 의해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환경이 조성되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뜻이라고 한다. 명리학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운명'이라는 말을 인용하곤 한다.
저자는 이 운명이라는 거대한 섭리 안에서 '시절인연'을 뽑아내었고 그 안에서 사람을 움직이게 한 '사랑'을 테마로 삼아 글의 소재를 이끌어 낸 셈이다.
수록된 작품은 총 10편이고 단편소설이지만 성장소설 같은 느낌이 들어 읽고 나면 긴 이야기를 쉽게 읽은 느낌이 들어 좋다. 마치 미니드라마를 본 기분이랄까. 소설은 한 사람의 서사를 지루하지 않게 끌고가고 있었는데 이는 저자의 큰 장점 같기도 했다.
이 단편집에는 어린아이시절부터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그리고 어른이 되기까지 한국사의 격동기를 거쳤던 다양한 삶 속에서 주인공들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성장소설은 동시대의 독자라면 그렇겠지만, 시대적으로 목도하고 직접 경험했던 현장감을 다시금 느끼게 해 준다. 그 안에는 감추었던 은밀한 비밀들도 있고 용기가 없어서 주저앉았던 불편함도 있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에 픽션을 녹아내어 독자들의 과거를 아름답게 포장해 주기도 하고 한편으론 불편한 치부를 덜 쳐내어 두근거리게 만든다.
나는 저자가 안내하는 성장배경이 나의 연대기 안에 있어서 조금 놀랐던 것 같다. 서랍 속에 있던 기억들이 스멀스멀 활자화되어 책 위로 펼쳐졌다. 읽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고 마치 나의 과거 속으로 안개를 걷으며 들어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 단편집은 5~60년대 출생하신 분들이라면 너무나 반갑게 읽힐 것 같다. 개인적으로 몇 편은 조금 더 살을 붙여 각색해서 영화화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국제시장이란 영화가 1950년대부터 1980년대의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했듯이 말이다.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았던 수많은 부침 속 사랑이야기는 사람을 견디게 해 준 또 다른 꿈이었으니까 말이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던 단편은 세 편 정도였는데, 우선 서막을 올린 '원더풀 달동네'였다. '원더풀 달동네'의 배경은 군부정권시절 산업화시절로 보인다. 모두가 공평하게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기로 부모는 아이를 나 두고 외지로 나갔고 밤늦게까지 배고픔을 참고 기다려야 했던 외로운 현수는 곧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거지도 많았고 밤도둑도 많을 때였다. 제대로 된 공교육이 없던 시절에 성교육이 있을 리 만무였다.
그때는 방 한 칸에서 오글오글 쥐떼처럼 모여 잤고 두 칸이 있는 집은 부자였다. 하지만 내 기억에도 사람들은 모두 따뜻했던 것 같다. 나쁜 놈들도 적당히 나빴다. 나눠 먹을 줄 알았고 그것이 당연하다 느꼈던 시절이었다.
'종이학'이란 단편을 읽으면 황순원의 '소나기'를 연상케 했다. 우리가 '소나기'를 사랑하는 것은 순수하고 깨끗한 첫사랑의 기억 때문이다. 종이학의 전설을 믿고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모습은 어른이 된 지금 읽어도 여전히 가슴이 뛰게 한다. 종이개구리는 꽁지를 튕기면 개구리처럼 펄쩍 뛰기도 하는데 요즘 애들은 도통 그런 재미를 모르니 아쉽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시절인연'은 불량 청소년과 어울리는 주인공이 나온다. 주인공이 나와 동명이라 눈이 커졌다. 주인공은 청소년시절로 불량 친구들과 어울리고 잠시 놀지만 졸업 후 진로가 바뀌고 사회인이 되어 잊힌 듯 살아가다가 술집에서 우연히 함께 했던 여자친구를 만난다는 설정을 하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건데? 궁금해하지만 그걸로 이 단편도 끝이다. 사각의 틀에서 주입식 교육을 받던 시절에 누구든 일탈을 꿈꾸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저자는 이런 심리를 과감히 소설로 진행했다.
그 외 여러 편들의 단편은 편하게 또는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읽었던 것 같다. 오히려 '당신은 누구세요?'란 단편은 비현실적이어서 더 좋았고, '계급사회'에서 단편은 마무리가 아쉬웠다.
나는 저자가 이 단편집에 수록된 이야기들을 모두 완성된 결말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솔직히 여느 소설에서처럼 편하게 읽히던 세련된 문체는 아니었다. 또 단편이 끝날 무렵 결론을 강요하는 듯한 한 줄 글과 삽화는 좀 생뚱맞았다. 그러다 좀 웃었던 것 같다. 순수하다 못해 용감하군.
이 단편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 하는 소설이다. 왜 그때 이들은 만나게 되었을까, 그리고 왜 헤어지고 다시 만나게 되었을까 궁금해진다. 그러다 문득 어쩌면 사회현상은 무차별적이거나 무작위적으로 발생한다고 믿지만 그 현상의 배경을 살펴보면 쉽사리 인지하기 어려운 연결고리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인과관계처럼 만물의 탄생과 소멸도 마찬가지니까.
명리학에서는 '모든 우연은 필연이라는 옷을 입고 나타난다'라고 말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필연성은 신념(가치)이라고 믿는 인간의 재능을 이끌어 내어 우회 작용으로 발현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가벼운 인연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다. 작품의 좋은 재료가 많은 작가란 생각이 든다. 음식에서 맛은 좋은 재료가 있어야 가능하다. 이 점에서 가장 큰 무기를 가진 것이다.